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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Mar 28. 2024

왜 세상은 경쟁할 때만 집중을 요구할까요?

사촌 동생 둘이 올해 대학에 입학했다. 첫째는 편입, 둘째는 재수다. 이모의 반응을 보니 나쁘지 않은 학교인 것 같다. 명절에 이 둘을 만났을 때 입시에 관한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않았다. 그들 역시 당시의 고생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굳이 헤아리지 않아도 눈 아래 깊이 내려앉은 다크서클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집 근처 학원가를 돌아다니면 입시전쟁의 단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퀭한 눈.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차림. 운동하고는 담쌓고 사는 듯한 굽은 어깨. 한국의 학생들이 주당 공부시간은 2021년 기준으로 49.43시간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주당 노동시간 52시간에 근접한 수준이다.    

  

여기에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없다. 하루 아홉 시간씩 책상에 앉아만 있는 것만으로도 호르몬이 폭발하는 10대들에게는 고통이다. 책상에 앉아 있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간다. 일상이 통째로 공부에 빨려 들어간다. 한국의 18세들은 좋든 싫든 이 총력전 체제 속에서 일 년을 보낸다. 당연한 인과지만 총력전의 끝은 소진이다. 여기엔 승자도 패자도 없다.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입학 전에 번아웃이 온 채로 스무 살을 맞는다.      


그래서 더 걱정스러웠다. 의욕이 떨어진 상태로 인생의 관문을 통과하면 시작부터 무기력과 회의감이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걸 아니까. 사람은 서서히 회복된다. 특정한 시점을 지났다는 이유로 부활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동안의 고통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출발점만을 얘기한다. 그러니 그로기 상태인 아이들에게 패기와 창의력, 근성을 요구하는 것이겠지.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이다. 20대 내내 수많은 시험과 경쟁이 기다린다. 어떤 의미에서 그 이후의 시험들은 입시보다 더 가혹하다. 6개월간 독서실에서 우체국 계리직 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하루에 8시간씩 책상에 앉아서 기계처럼 교재를 외우고 문제를 풀었다. 햇빛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책상에서 하루를 다 보냈다. 예민한 사람들은 단 몇 번의 기침과 기척에도 서로를 증오했다.      


가장 힘든 건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인간적으로 성장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공부를 접는 순간 내가 그동안 읽고 외운 것들은 그저 휴지조각일 뿐이었다. 분명 하루에 8시간씩 계획대로 공부에 집중했는데, 정작 나 자신은 암흑 속에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머리는 덥수룩하고, 팔다리는 근육 대신 물렁한 살로 채워졌으며, 그 어떤 의욕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험에 몰입한 대신 나 자신을 버린 대가였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시험에서 떨어졌다. 나보다 더 독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얘기다. 나의 불행함보다 그들의 성공이 더 놀라웠다. 그들은 대체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내려놓았던 걸까.      


한국 사회에서 집중은 경쟁의 도구다. 일상의 충만함이나 정신적 고양을 위한 지렛대가 아닌 계급투쟁의 무기로서 동원되는 정신력이다. 이런 유형의 집중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가장 후순위로 밀어낸다. 오늘의 스트레스를 털어내기 위해선 안식이 아닌 오락이, 즐거움이 아닌 쾌락이 갈급해진다. 피로함에 곤죽이 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움직임을 최소화 한 채 뇌에 쾌감을 들이붓는 일 뿐이다.


그렇게 하루 일과가 끝나면 30초짜리 숏폼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고, BJ의 ‘먹방’을 보며 배달음식을 먹는다. 자기 전에 누우면 불안감이 덮쳐오고, 이걸 잊기 위해 SNS 스크롤을 기계적으로 밀어 올리다 기절하듯 잠든다. 그렇게 일어난 아침은 늘 우울하다.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기계적으로 짜 놓은 일상이 나를 ‘같은 것들의 지옥’으로 빠뜨린다.


짧은 기간이지만 시험을 준비하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아침마다 베개에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기약도 보장도 없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스스로를 감옥에 가둬버린 일상이 숨막혔. 20대 후반을 지나 온 모두가 그랬듯, 기업과 조직에 선택되기 위한 경쟁이란 차라리 전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시간을 지나온 이후 시험에 합격하거나 취업에 성공했다는 지인들을 보면 가끔 주제넘은 걱정이 든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얼마나 쥐어짰을까. 그렇게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바로 다음 주 출근이라니. 조직에서는 신입이니 뭐든지 열심히 하라고 요구할 텐데. 뭔 힘이 남아 있어야 열심히 하지.       


사람들의 집중력이 떨어져간다고 이야기하기 전에 한 번 생각해보자. 저마다 지나온 관문의 끝과 시작은 어땠나. 간신히 삶의 관문 하나를 넘어섰을 때의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나. 왜, 늘, 우리는 모든 것을 소진시켜야만 다음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걸까. 이 세상은 대체 뭐가 급해서 추스릴 시간 없이 새로운 시작으로 짓누르는 걸까. 새로운 관문에 진입한 세대들에게 참고 버티라고 얘기하기 전에, 그들이 경쟁 과정에서 이미 한 차례 소진됐으리라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이게 집중력 저하를 우려하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한국적 맥락이라 생각한다. 생애 주기마다 끊임없이 퀘스트가 주어지고, 그 관문 앞에서 구성원들은 언제나 총력전을 요구받는다. 그 안에서 가장 소외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자신이다. 이 땅에 휴식은 있을지언정 안식은 없는 이유다. 왜 우리의 집중은 목숨을 걸 때에만 동원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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