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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Mar 22. 2024

눈 감고 음악에만 집중한 적 있나요?

(이렇게 얘기하면 연식이 들통 나 좀 싫지만) 카세트테이프 세대다. 정확히는 카세트테이프에서 CD로, 이게 다시 MP3플레이어로 바뀌는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중학교 1학년 때 카세트플레이어를, 중학교 3학년 때 CD플레이어를, 고2 때 MP3플레이어를 썼다. 4년 사이에 음악을 듣는 방식이 세 번이나 바뀌었으니 그 시기도 어쩌면 일종의 격변기가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체감하건대 이 중 가장 큰 변화는 MP3의 등장이었다. 카세트테이프나 CD처럼 늘어지거나 열화(劣化)되지 않고, 플레이어의 무게와 크기도 비약적으로 줄어들었다. 자기 마음대로 플레이리스트를 꾸릴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유료화가 정착되지 않았던 초기 디지털 음원 시장 탓에 무료로 음악을 듣게 됐다(물론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었다). 이 파괴적인 변화로 사이버 세계에 무한대에 가까운 음악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 변화는 내가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수많은 곡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음악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 듣지 못하는 곡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도입부만 듣고 넘겨 버리는 경우도 적잖았다. 개별 곡들을 쉽게 들을 수 있게 된 탓인지 그 자리에서 앨범 하나를 다 듣기가 버거웠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2015년 인디밴드 전자양은 메트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새 앨범 <소음의 숲>을 만들 때) CD는 70분이라는 생각으로 음악을 만들었는데 다들 끝까지 잘 듣지 못하더라"며 수록곡을 다섯 곡으로 압축한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스포티파이와 유튜브 뮤직이 세상을 지배한 지금은 이조차도 문제라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다. 소비하는 콘텐츠에 온전히 몰입하지 않는 게 아예 기본값이 된 것이다. 하긴, 5분짜리 영상도 1.5 배속으로 보는 시대 아닌가. 사실 내 얘기다. 5분짜리 영상을 보는 1.5배속으로 보는 동안에도 단톡방에서 메시지를 주고받고, 계좌이체를 하고, 배달 앱에 들어가 저녁 메뉴를 고른다. 솔직히 1분짜리 쇼츠영상도 길다고 넘긴 적도 많다.   


결국 내게 음악적인 감동을 줬던 건 카세트테이프와 CD를 번갈아 듣던 시기였던 것 같다. 지금 10대 20대들이 음악을 산만하게 듣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당시 플레이어들의 기술적 한계가 의도치 않게 소비자의 집중을 강제하도록 도왔다는 얘기다. 먹을 것도 있고 컴퓨터도 있는 집보다 독서실에서 공부가 더 잘 되는 것처럼. 어떤 면에서는 모순적이다. 음악에 몰입할 수 있도록 모든 불편함을 제거했는데 이 편리함이 더 많은 딴짓을 부추기고 있다니.   


자기 전에 오롯이 음악만 들어보기로 한 결심이 하나의 도전이었던 건 그래서다. 돌이켜보니 자기 전에 음악을 눈 감고 들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음악이 내게 행복을 주던 때로. 오직 그 기쁨으로 밤을 기다리던 시절로. 사실 음악을 듣기 제일 좋은 시간은 자기 전이다. 낮의 소음들 때문에 들리지 않던 미세한 소리들이 밤에는 생생히 들린다. 그 소리들의 행간을 읽다 보면 곡을 쓴 이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가수나 래퍼가 어떤 의미로 어떤 마음으로 곡을 표현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도전을 옮긴 첫째 날, 제일 먼저 들은 노래는 아이유의 <라일락>이었다. 평소에 자주 듣던 곡인데도 암흑 속에서 들으니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음악에 담긴 미세한 공명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어딘가 낯설다. 새로운 곡 같다. 왜 나는 이 곡을 수십 번 들었으면서도 그녀의 감정과 호흡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아이유가 "나리는 꽃가루에 눈이 따끔해 / 눈물이 고여도 꾹 참을래"라고 말하며 내뱉는 호흡에서 알 수 없는 기분이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이 곡에서 표현하는 중요한 맥락을 지나쳤음을 깨달았다. 완벽한 작별을 하고 싶다는 다짐 이면에 꾹꾹 눌러 놓은 감정들 말이다. 누구에게 하나하나 풀어놓을 수 없는 상대와의 시간들. 이별을 결심하기까지 쌓아 놓은 상처들.     


그렇다면 그게 뭐였을까? 알 수 없다.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상대와 이별을 하겠다는 그녀의 다짐이 확고하다는 것만은 알겠다. <라일락> 속 아이유는 어떤 사람일까. 왠지 힘든 일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은 채 꾹꾹 삼키는 사람일 것만 같다. 책을 읽다 보면 즐겨 쓰는 표현과 단어에서 저자의 성격과 마음이 들여다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곡을 다 들었을 때의 기분이 그랬다. 끝내 알아낼 수 없는 걸 미련 섞인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건, 그 대상에 이미 빠져있다는 의미다.


자, 다음엔 뭘 들을까? 플레이리스트에 저장된 노래들을 살펴봤다. 모두 310곡이었다. 뭐야! 그동안 이 곡들을 배경음악처럼 소비해 놓고 들을 게 없다고 투정을 부렸단 말이야? 지구가 더워지고 곳곳에서 전쟁이 터져도 훌륭한 음악들은 늘 화수분처럼 쏟아진다. 그걸 소비하는 나만 멈춰 있었을 뿐이다. 불을 끄고, 눈을 감고, 명상하듯 심호흡을 하면 무심코 지나친 309개의 노래 역시 다르게 다가오겠지. 잠들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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