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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Mar 07. 2024

'저글링'이 불러온 번아웃

최근 몇 달 전부터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날들이 이어졌다. 얼굴에 베개를 파묻고 소리를 질러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밥도 맛이 없었다. 뭘 해도 재미가 없었다. 피곤해도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냥 다 지긋지긋했다. 이쯤이면 ‘그냥 비타민이나 챙겨 먹지 뭐’ 하며 넘어갔을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화가 나면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평소였으면 ‘오늘 일진 더럽네, 집에 가서 햄버거나 시켜 먹어야겠다! 히히’하고 넘겼을 일도 쉽게 털어내지 못했다. 밀려서 잔뜩 쌓인 주문. 부당한 요구들. 매장에서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하지? 싶은 사람들. 죄송할 일이 없는데도 사과를 해야만 하는 순간. 겪고 나서는 괜찮다 여겼는데, 아니었나보다. 되뇌일수록 씹다 만 껌들이 머릿속 어딘가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 찝찝한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분노의 자양분이었음을 이제는 확실히 안다. 어느 순간부터 화가 나면 절제가 되지 않았다. 스스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찬물로 세수를 하면 좀 괜찮을까 싶어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열이 올라 목이 벌겋게 달아오른 내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지금의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 화를 주체하지 못할 때마다 아내는 그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혼자서 씩씩대는 모습이 배우자에게 좋은 영향을 줄 리 없었다. 아니, 이미 꽤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전문기관에서 심리상담을 받아보자고 먼저 권한 것도 아내였다. 심리상담이라니. 제안을 처음 들은 순간 티비 속 부부 솔루션 프로그램에서 본 장면들이 떠올랐다. 산후우울증, 알코올 중독, 육아 문제 등등. 아아! 내가 이 정도로 아내에게 상처를 줬던 걸까. 죄책감이 마음 한 켠을 짓누르는 그 반대편에는 나의 내면을 타인에게 드러내야만 하는 게 죽기만큼 싫은, 이기적인 마음도 공존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안 이상 아내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결국 신청한 상담. 상담 전에 진행한 기질 및 성격검사의 결과는 나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충격적인 결과였다. 새로운 일에 맞서려는 의욕과 자존감은 0점인 반면, 위험을 피하려는 성격과 불안감 지수는 만점을 기록했다.


초면인 상담사는 차분한 말투로 지금 나의 심리상태를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낮은 자존감과 의욕저하로 외부의 자극에 취약하며, 그 때문에 생긴 막연한 불안감이 일상을 잠식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몇 년간 괴로워했던 것들이 설문 결과와 상담사의 설명으로 낱낱히 드러났다.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그쯤 되니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털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손님들을 상대하며 받은 상처들. 밀려드는 일을 소화하지 못해 가게가 마비되는 악몽들.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못할 거라는 생각으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살아왔는지. 그것과 화를 참기 힘든 지금의 상태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얘기까지. 상담사는 전형적인 번아웃 증상이라고 말해줬다.


살짝 어이가 없었다. 번아웃이라니. 그건 성실하게 살아온 이들이 겪는 병 아닌가?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사장님들에게 지금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어떤 반응일까. 주말도 공휴일도 없이 매일 12시간 영업을 하는 게 해가 뜨고 지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이 세계에서 번아웃이 가당키나 한가? 그제야 나는 반문했다.


"제가 번아웃이라고요? 그래도 저는 쉬는 날도 있는데요? 다른 분들에 비해서 제가 유난히 성실한 것도 아니고. 다들 이렇게 살지 않나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식당 일이라는 게 굉장히 정신적인 소모를 불러 일으키는 것 같아요. 일단 대표적인 감정노동 직군이고. 그리고 대부분의 직군은 주어진 일 한 가지를 완결한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잖아요? 근데 식당에서의 일은..."


"동시에 여러 개를 해내야 하죠. 그것도 초(秒)단위로."


"그게 사람을 극도로 피곤하게 만들거든요. 상당히 가혹한 형태의 멀티태스킹을 하고 계셨던 거죠."


사실이다. 한 번에 세 네 가지의 일을 하는 게 식당 일의 기본이다. 손님 상을 세팅하면서 테이블을 치우고, 전화로 포장주문을 받고, 그 와중에 다른 손가락으로 배달 앱 주문을 받는다. 그 사이에 반찬을 리필해 달라는 손님의 호출이 오고, 필요에 따라선 주방까지 뛰어들어가 손을 보태야 한다. 신경과학자인 MIT공대의 얼 밀러 교수는 언젠가 "뇌는 동시에 한 두 개의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고 얘기 한 바 있다. 동시에 여러 일을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건 일종의 "저글링"이라는 것이다.


저글링. 그게 내가 매일 하는 일이었다. 그것도 외발자전거를 탄 채 공을 대여섯 개씩 돌리면서. 이렇게 일하다보면 당연히 하늘에서 우르르 떨어지는 공에 머리를 두들겨 맞는 일이 생긴다. 포장 용기에 돈가스 소스 넣는 걸 까먹고, 엉뚱한 메뉴를 서빙하고, 새로 주문한 사이드메뉴를 누락시키는 일들이 반드시 벌어진다(이 모든 일이 한 번에 벌어진 적도 있다). 이 때 내가 살아남는 법은 단 하나다. 고개를 90도로 처박고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는 것. 물론 그 사이에도 일은 쌓여간다(젊은 사람들이 요식업에 선뜻 뛰어들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장사가 잘 되는 듯 보이지만 그렇진 않다. 인건비나 간신히 건지는 식당의 일상적인 업무 패턴이다. 장담컨대 어느 식당이라도 이럴 것이다(셀프 바를 운영하는 식당도 바쁜 건 똑같다). 단 두 개의 주문이 들어와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물을 내주고, 식판을 세팅하고, 이따금 직원 호출 벨이 울리고, 상을 걷어가고, 식기세척기에서 나온 식기를 원위치에 놓고, 반찬그릇에 반찬을 담는다. 대충 계산해보니 바쁠 때는 1분 미만, 한가할 때는 3~4분 간격으로 움직여야 한다. 내 몸은 오직 타인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이 짓을 열 한 시간 가까이 한다. 벌써 올해로 11년 차다.


문제는 그 산만함이 나머지 일상까지 잡아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가벼운 운동을 하고, 유튜브 쇼츠 영상을 보면서 밥을 먹고, 누워서 다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잠든다. 언제부터인가 책은 속독이나 발췌독이 습관이 됐고, 영화는 ott서비스로 주요 장면만 본다. 그 주요 장면도 SNS 밈이나 유머 글들을 읽으면서 본다. 어떤 때는 한 가지에 집중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불안하게 느껴진다. 가뜩이나 휴식시간이 짧은데 책이나 영화를 보는 데 두 시간을 써 버리면 뭔가 억울하다.  


"이렇게 개인 시간을 보내는 것도 영향이 있을까요?"


"네, 쉴 때는 한 가지 일만을 몰입해서 하시는 게 좋아요. 여러 개를 같이 끼고 즐긴다고 특별히 재밌던가요? 여러 가지 일을 같이 하면 뇌는 그 자체로 부담을 느끼기 쉬워요. 여러가지 정보를 한 번에 받아들이는 게 그 자체로 과부하거든요. 진짜로 쉬는 느낌을 받으려면 몰입이 필요해요.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든가."


물론 이게 번아웃에 대한 근본적이고 완전한 치유법은 아니다. 상담사는 정말 번아웃에서 벗어나려면 지금 하는 일을 관두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자율성과 성취감, 사회적 관계망을 갉아먹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그 말이 맞다면 내가 이 일을 하는 내내 고통은 계속될 것이었다. 사실 이전부터 직감하던 것이었다. 언젠가 스스로에게 한계가 올 것임을.


그렇다고 어떻게 내 밥벌이를 하루 아침에 관둘 수 있겠는가. 하루아침에 결론이 나지 않을 이 고민과는 별개로 나는 내게 주어진 휴식 시간을 조금 더 소중하게 쓰기로 했다. 온전하게 한 가지에 몰입할 수 있는 일상을 되찾기로. 미래를 고민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온전하게 쉬는 노력은 분명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막강한 세 명의 적과 싸워야만 했다. 핸드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 그리고 단시간에 효율적으로 여러 가지를 해 보겠다는 헛된 욕심. 실행에 옮겨보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회복을 위해서는 분명 맞서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 앞에 주어진 것에 집중하겠다는 다짐과, 실패, 그리고 온전한 몰입이 내게 준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다. 그 얘기는 이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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