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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척은 손님 봐 가면서

by 일로


Menu 21. 아는 척은 손님 봐 가면서


십 년 전부터 자주 오던 단골손님이 한 분 있다. 중학생 때부터 우리 가게를 찾았다. 활발한 성격 탓에 우리와도 말을 한 두 마디 섞다 보니 길가에서 봐도 아는 척을 하는 사이가 됐다. 가끔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식사를 하러 왔다. 공부를 꽤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새해였나. 그녀의 어머니가 집에 가져갈 돈가스를 주문했다. 딸의 것이라 했다. 이번에 신촌에 있는 대학교에 붙었다며 자랑했다.


그녀가 봄이 되자 학교 이름이 박힌 점퍼를 입고 나타났다. 대학생활이 재밌는지 웃음이 더 밝아 보였다. 그녀를 보면 우리도 덩달아 즐거웠다. 내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구나. 그때 한 번 더 깨달았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소식이 끊겼다. 대기업 인사팀에 취업했다며 기뻐하던 게 마지막이었다. 신입이니 얼마나 바쁠까. 회사가 강남에 있다니 아예 이 동네를 떠났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2년쯤 지났을까.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트레이닝복에 푹 눌러쓴 검은 모자. 대학생에서 다시 수험생으로 돌아간 듯한 모습이었다. 웃음기가 싹 빠졌다. 아는 척도 안 한다. 내가 아는 그 손님이 맞나. 당황스러웠다. 그게 뭐든 상황이 좋지 않은 건 대번에 알겠다.


일단은 “어서 오세요”라고 말을 건네고 여느 손님에게 하듯 응대했다. 개인적인 말은 건네지 않았다. 스스로를 다잡았다. 주제넘어선 안 된다. 여기서 우리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건 딱 둘 뿐이다. 거리를 두고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본분을 다 하는 것. 조용히 먹고 조용히 갈 수 있도록 익명성을 보장해 주는 것. 그녀는 요즘도 식사를 하러 온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키오스크로 주문과 계산을 한다. 그리고 조용히 먹고 소리 없이 간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걸 필요가 없도록 필요한 것들을 미리 쟁반에 챙겨주고 다른 일에 전념한다.


경험하건대 단골손님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다. 만남형 손님과 익명형 손님이다. 만남형 손님은 타인과의 접촉에 익숙하다. 자주 오면 눈인사를 하고 인사를 건네면 짧게나마 응답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인싸’ 손님들은 가끔 나눠 먹으라며 과일이나 과자를 건네주곤 한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길어지면서 가족관계나 직업에 대해서도 아는 게 생긴다.


식당일은 반복 작업과 감정노동을 같이 해내야 한다. 같은 일, 같은 말, 같은 용건의 전화로 열 시간을 채운다. 그 단순함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다 보니 때로 상처도 받는다. 그때 이런 유형의 손님들은 활력소가 된다. 세상이 아직 살 만하다는 걸 보여주는 증인들이다.


익명형 손님은 조용히 와서 조용히 간다. 보통 혼자 온다. 인사도 잘 받아주지 않는다. 보통 구석진 테이블을 선호한다. 아예 벽을 향해 앉는 경우도 있다. 식사가 나오면 이어폰을 낀 채 핸드폰에만 시선을 고정한다. 키오스크를 도입한 이후에는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손님들도 많다. 이런 유형의 손님은 나갈 때도 기척 없이 나간다. 은신술 학과 수석졸업하신 분들인가. 발소리도 안 난다. 너무 기척이 없어서 화장실에 간 줄 알고 테이블을 한 시간동안 안 치운 적도 있다.


서운하지 않으냐고? 글쎄. 저마다 식당을 소비하는 방식과 관점이 다를 뿐이다. 누군가에게 식당은 사회적 교류의 장이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조용히 자신의 필요를 채우고 가는 곳이다. 후자의 손님들에게 필요한 건 익명 보장이다. 그들의 일상에 침투해서 불편함을 끼치면 안 된다.


오히려 이런 유형의 손님은 우리가 지켜줘야 한다. 나도 혼자 외식을 할 때는 조용히 먹고 나가고 싶을 때가 많다. 이럴 때 사장님이 아는 척을 하면 괜히 부담스럽다. 호의를 무시하고 싶은 게 아니다. 타인과 말을 주고받는 행위 자체가 정신적으로 힘겨울 뿐이다. 그 순간에 타인이 불쑥 들어오면 조금 버겁다.


손님을 향한 호의의 첫걸음은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갈지, 멀리서 지켜볼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너무 어렵다고? 표정과 제스처, 선호하는 테이블의 위치, 앉는 자리를 보면 슬슬 알게 된다(흔히 말하는 ‘인싸’ 손님들은 먼저 다가올 때가 많다). 무엇보다 내가 외식을 할 때 어떤 마음으로 식당에 들어가는지 되돌아보는 게 중요하다. 적당한 거리두기만으로도 1년 단골을 N년 단골로 모실 수 있다. 이때 핵심은 ‘친절’이 아니다. 타인의 영역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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