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이상한 특기를 가진 사람들을 알고 있다. 이를테면 노래에 맞춰 엉덩이를 번갈아 씰룩댈 수 있는 친구는 어떤가? 고등학교 시절 친구는 잠을 20시간씩 잘 수 있다. 대학시절 같은 과 선배는 학교 축제에서 요구르트 1리터를 ‘원 샷’해 상금 10만 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나는? 사과를 잘한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7살 어린아이 앞에서 90도로 사죄할 수 있다. 10년 간 식당에서 일하면서 수 없이 사과를 해 본 결과다. 자존심이 구겨진다는 생각은 전혀 해 본 적이 없다. 한 번 허리를 숙일 때나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쉽다. 어느 순간부터는 여기에 진정성을 실을 수 있는 경지까지 왔다.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상대의 입장에서 사과가 가능하다.
사과에는 세 가지 요소가 반드시 담겨야 한다. 현장에서 신속하게. 육하원칙에 따라. 상대가 화가 난 이유를 정확히 파악해서. 반어법이 아니다. 사과를 잘할 줄 안다는 건 꽤나 유용한 특기다. 결혼이 그랬다. 다른 커플처럼 우리도 몇 번의 위기를 겪었고, 나는 그때마다 위의 원칙에 근거해 사과했다. 사과한다고 상대의 분노가 일거에 해소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사태가 더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말과 행동에 진정성을 담을 수 있다면 말이다. “오빠가 사과를 잘하는 인간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남남이었을 거야” 최근에 들은 얘기다. 너무 저자세로 사는 거 아니냐고? 나는 그저 내가 잘못한 것을 진심으로 인정했을 뿐이다.
내가 식당에서 일하는 내내 식당 리뷰가 깔끔했던 것 역시 사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하는 일이 다 그렇듯, 완벽할 수 없다. 실수는 늘 생긴다. 피할 수 없다. 여기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손님들의 만족도가 달라진다. 경험하건대 친절의 끝은 사과다. 고객의 작은 불편사항에도 “아이고, 죄송합니다!”라고 반응하는 곳과 아닌 곳의 차이는 분명 크다.
당연히 나도 처음부터 사과를 잘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람과 사람이 싸운다는 게 무섭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사과하는 법을 연습했다. 싸움이란 의지와 의지의 충돌이다.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선 걸어야 할 것들이 생기고, 여기서부터는 양측 다 절제가 힘들어진다. 결국 둘 다 사회적으로 내상을 입을 수 있다. 사소한 불편사항이 고객 분쟁으로 비화되는 전형적인 과정이다. 갈등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한 최선의 표현은 “죄송합니다” 뿐이다. 사과부터 일단 하고 나야 각자 자초지종을 교환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것이 한국 특유의 문화인지, 인류의 보편적인 도덕률인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당신과 나는 각자의 과실을 돌이켜 보고 먼저 사과하는 것을 도리로 여기는 사회에서, 그것도 외식업에 종사하며 살아간다. 밑도 끝도 없이 사과하면 내 자존심은 어떻게 챙기냐고? 글쎄, 나는 자존심은 허영심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과도한 비용을 지울 뿐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 ‘과도한 비용’이 단순히 돈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자존심을 위해 치러야 할 최악의 비용은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다. 고객이 불쾌함을 넘어서 화가 났다면? 생각보다 골치 아픈 일들이 생길 수 있다. 손님이 구청 위생과에 신고를 할 수도, 본사에 연락해 회사 차원의 사과 및 점주에 대한 행정적 처분을 요구할 수도 있다. 여기에 온갖 저주가 담긴 리뷰는 덤이다. 그 단계까지 가면 막상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자신과 자신의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사과는 필수 덕목이다. “죄송합니다” 다섯 음절이 가게를 구한다. 어떤 경우에도 사과는 당신에게 남는 장사다.
신기한 건, 일단 사과를 하고 나면 그제야 상대의 입장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도 나름의 의도와, 나름의 맥락과, 나름의 도덕률과 상식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 말이다(물론 끝내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지만...사실 이런 경우는 정말 흔치 않다).
경험하고 나니 사과가 단순히 자기 방어 수단으로써만 기능하지는 않더라. 전문 서버, 또는 외식업자로서의 성장이란 상대의 입장을 마음으로 체감하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그저 많은 일을 겪었다고 그것이 경험이 되지는 않는다. 스스로가 발전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경험은 그저 과거일 뿐. 이 역시 고객 앞에서 진심으로 사과를 해 봤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과실(果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