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로 Jul 10. 2024

냉동만두, 그 욕망의 실체

그린사람: ㅅㅂ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들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아내에게 사놓고 먹지 않은 음식들에 대해 잔소리를 들었다. 아내가 냉장고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냉장고 정리지만, 그 칼날은 나의 충동구매를 응징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아내가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나를 보며 손을 까딱거린다. 응? 오라고?      


마지못해 걸어갔다. 난 이제 죽었다. 한 살이든 마흔 살이든 잔소리는 언제나 싫은 법이다. ‘아니, 사 봐야 그거 얼마나 된다고!’라고 뻗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잘못한 게 맞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냉장고를 보자마자 바로 항복했다. 한눈에 봐도 양이 많았다. 이건 이태원에서 산 올리브, 이건 대형마트에서 산 스테이크 소스, 이건 파스타를 해 먹을 때마다 뿌려먹겠다고 산 대용량 파르메지아노 치즈.     


응? 왜? 그게 끝이 아니라고?      


아내가 냉동실을 가리킨다. 사놓고 달랑 한 입 먹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냉동만두. 무려 세 봉지다. 종류가 각각 다른 걸 보니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하나씩 샀나 보다. 이건 불맛이 더해진 짬뽕 맛이라고 혹해서 하나. 이건 국내에서 가장 얇은 두께의 만두피라 해서 하나. 이건 육즙이 죽여준다고 해서 하나. 이쯤 되니 내가 사놓고도 새삼스러운 상황. 내게 이 정도 양이면 저녁마다 보름은 먹을 양이다. 그때 내려온 아내의 명령. “당장 해 먹어!”          


“그래, 먹긴 먹어야 하는데……. 아까 저녁 먹었잖아!”

“그거 먹고 아침 먹지 마, 그럼.”      


반격 실패. 일단 잘 달랜 뒤 일단 한 봉지만 해결하기로 합의를 봤다. 가장 피가 얇은 냉동만두를 집었다. 여섯 개. 하필 교자도 아니고 왕만두다. 묵묵히 냄비에 물을 붓고 찔 준비를 했다. 서둘러 양념간장을 만들었다. 식초와 넣고 위에 참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조금 심심할 것 같아 선반에서 고춧가루를 꺼내려는데 그 옆에 페페론치노 한 통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저건 또 언제 샀지? 아내가 안 보게 몇 알 털어서 간장 위에 부스러뜨렸다.     


마트에 가면 스트레스가 풀린다. 누군가가 패션 아웃렛의 쇼윈도를 볼 때 느끼는 흥분을 나는 마트에서 느낀다. '뭐? 시리얼 두 개가 묶음으로 8천 원?' '어머 이건 사야 해!' 충동구매가 두려워 뭐든 배를 채우고 장을 보는 편이지만, 이따금 백화점 식품관에 구경 가면 이성 보존을 위한 안전장치는 무용지물이 된다. 그리고 다음 날 어김없이 후회한다. 얼마 전에는 마블링 1등급 소의 지방으로 국물을 낸 라면이라고 혹해서 사버렸는데, 묶음 상품이라 처치 곤란한 상태가 됐다. 형편을 고려해 3만 원 이상의 지출은 되도록 자제하지만, 어쨌거나 충동구매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이걸 쇼핑 중독이라고 봐야 할까. 괜히 불안해서 인터넷에서 쇼핑 중독을 검색했다.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맞아! 가족들이 보지 못하도록 물건을 숨긴다? 완전 맞아!(그게 우리 집 냉장고). 그렇게 10개 문항 중에 다섯 개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 정도면 중독인가. 쇼핑중독의 근본적 치료는 작은 것에서 만족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정신과 홈페이지 속 의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를테면 “오늘은 맛있는 걸 먹었으니 만족해” 같은. 하지만 허겁지겁 먹고 일해야 하는 직업 특성상 내게 그런 감정이 생길 리가 없다. 식당 노동자의 결핍이 먹는 것이라는 이 아이러니. 그렇게 이뤄진 충동구매. 남은 재료들이 냉장고에 쌓여가는 건 당연한 인과다. 어쩌면 남겨진 욕망의 흔적들을 냉장고가 조용히 숨겨 주리라 막연히 생각했던 건 아닌가. 누군가가 냉장고를 욕망의 대합실이라 표현한 건 그래서겠지.          

 

모든 욕망에는 대가가 따른다. 언젠가는 그 욕망에 책임져야 할 일들이 생긴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그렇다면 지금 냉장고를 열어보자. 언제 어디서 뭘 샀는지 남김없이 기억난다는 이들만이,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 다 먹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들만이 나에게 돌을 던지길. 마트 충동구매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후딱 먹어 치우든가. 사놓질 말든가. 차마 안 살 자신이 없어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밤마다 냉동만두를 찐다. 더불어 내 살도 찐다.

이전 18화 노동 소외와 육개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