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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PLS 이혜령 Feb 11. 2019

소설과 함께 보는 방글라데시의 탄생

<작전명 서치라이트: 비랑가나를 찾아서> 읽기 (5)


이 글은 소설 <작전명 서치라이트 : 비랑가나를 찾아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설의 시대 배경인 방글라데시의 근현대사를 정리한 글입니다. 방글라데시의 근현대사는 1947년부터 1971년까지 방글라데시의 탄생에 대한 글과 방글라데시의 건국 그 이후에 대한 글, 두 편으로 나누어 연재됩니다

방글라데시의 근현대사① 방글라데시의 탄생 (1947년 8월 14일 ~ 1971년 12월 16일)


2013년 2월, 방글라데시 샤허박 광장


 "우리는 사형을 원한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독립전쟁 동안 반인륜적인 범죄를 행한 전범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라고 외쳤다. 1971년 독립전쟁 당시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반대한 이들은 파키스탄군의 학살과 강간, 고문 등을 도운 혐의로 2013년 재판에 회부되었다. 파키스탄군과 라자까르(파키스탄과 통합을 주장하던 지지자들)는 민간인 300만 명을 학살하고 20만 명이 넘는 여성을 강간했다.


전쟁은 이미 반백년 전에 끝이 났지만, 전쟁이 만든 혼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1947년 8월 14일, 해체된 거대한 제국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200여 년간 영국 식민지배(1757~1947)가 막을 내리고 인도는 비로소 독립한다.

히말라야에서 인도양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버마(미얀마)에 이르기까지 가장 거대했던 인도제국은 영국의 지도자들에 의해 해체되어 독립을 맞았다. (아프가니스탄은 제3차 앵글로-아프간 전쟁 이후 1919년 8월 19일에 독립을 쟁취했고, 버마(미얀마)와 실론(스리랑카)은 1948년 분리 독립됐다.)


1947년 8월 14일, 이 거대했던 제국은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어 독립한다.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비폭력 운동을 전개하여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던 마하트마 간디는 '종교 구분 없이 하나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라고 외쳤지만, 반이슬람 힌두교 급진주의 무장 단체의 총에 맞아 암살당하고 말았다.



벵골지역 지도 (인도의 웨스트 벵골주와 방글라데시)



1905년, 벵골 분할령으로 촉발된 갈등

이슬람교와 힌두교 간의 종교 갈등은 영국의 식민 정책이 낳은 결과였다. 1905년, 영국은 인도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던 벵골 지방을 서와 동으로 나누는 벵골 분할령을 발표한다. 서벵골(현재 인도의 웨스트 벵골주)에는 힌두교 신자를, 동벵골(현재 방글라데시)에는 무슬림 자치구를 만들어 종교적으로 분열하여 인도의 민족 운동이 나눠지길 의도한 것이었다. 이후 폭력 사태와 저항 시위도 늘자, 결국 1911년 두 지역은 다시 하나로 통합된다.

그러나 이 벵골 분할령으로 인해 촉발된 벵골 지역의 힌두교-이슬람교 신자 간의 분열은 계속해서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었고, 이로 인해 훗날 1947년 인도 대분할 시, 동벵골 지역이 동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되는 결과에 이른다.



억압받는 동파키스탄

거대한 인도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현재 방글라데시) ⓒDAPLS

 1947년, 분리 독립한 파키스탄은 인도 서북부의 서 파키스탄과 동북부의 동 파키스탄 두 지역으로, 지금의 방글라데시가 당시에는 동 파키스탄이었다. 거대한 인도를 사이에 두고 1600km나 떨어져 있는 두 파키스탄은 지리적인 문제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가 서로 달라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정부의 예산도 서 파키스탄 중심으로만 쓰였고, 노골적인 차별정책으로 동 파키스탄 사람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우세했던 서 파키스탄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언어인 우르두어만을 공식어로 채택하고 학교 교육과정이나 관공서뿐 아니라 문학에서도 벵골어를 못 쓰도록 하여 일상에서 벵골어를 빼앗으려 했다. 이에 동파키스탄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1952년 2월 21일, 언어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사람들

결국 1952년 2월 21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은 시민들이 벵골어를 말살하려는 파키스탄 정부에 대항하여 거리로 쏟아졌다. 파키스탄 정부는 무력으로 사람들을 진압하려 했고 당시 출동된 파키스탄 경찰의 발포로 학생을 포함한 민간인 4명이 목숨을 잃는다. (결국 1956년, 파키스탄 정부는 벵골어도 공식 언어로 인정한다. 이후 2001년, UNESCO에서 2월 21일을 '세계 모국어의 날'로 지정했다.) 이 사건은 방글라데시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파키스탄은 나라가 아니라 한 마리 암소다. 그 앞다리는 동쪽에 심겨 있고 뒷다리는 서쪽에 심겨 있다. 벵골인들이 매일 풀을 먹여 그 소를 살리는 데, 젖을 짜는 것은 서파키스탄인들이다. 동파키스탄은 수익의 60퍼센트를 벌지만 단 25퍼센트를 소비한다. 서파키스탄이 나머지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1인당 국민 소득은 더 높지만 물가는 더 싸다. (p.35)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본 동파키스탄 지역은 육지와 바다를 구별할 수 없는 물바다였다고 한다. ⓒLIFE


1970년 11월 12일, 벵골만을 강타한 사이클론 ‘볼라’

동 파키스탄은 납세거부운동 등 저항 운동을 벌이며 지속적으로 파키스탄 정부에 자치 요구를 하였으나, 묵살되었고 동 파키스탄에 대한 차별정책이 심해진다. 그러다 억압되어 있던 동 파키스탄 사람들의 불만을 터트리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사이클론 '볼라'가 동 파키스탄 지역인 벵골만을 강타해 50만 명 이상이 실종되거나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는 20세기 최악의 자연재해 중 하나로 손꼽힌다.


하지만 인도의 서벵골 지역도 볼라의 영향권 안에 있었으나, 동 파키스탄(동벵골) 지역에 비해 피해가 훨씬 적었다. 파키스탄 정부는 당일에야 경보를 발령했지만, 인도 정부는 전날부터 경계령을 내려 사이클론에 대한 대비를 했기 때문이었다. 파키스탄 정부는 사이클론 '볼라' 이후 무성의한 구호 활동으로도 동 파키스탄의 지도자와 세계 여론에 냉혹한 비난을 받는다.



파키스탄 총선거에 앞서, 다카 팔탄 메이단 광장에서 연설하고 있는 AL당의 무지불 라허만 ⓒDawn/White Star Archives


1970년 12월 7일, 파키스탄 총선거

12월 7일 치러진 총선거에서 동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을 주장해 온 아와미 연맹(Awami League)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독립 이래 오랜 세월 군사독재 아래 있었던 파키스탄이 이를 끝내기 위해 치른 첫 총선거였다. 그 총선에서 동 파키스탄의 아와미 연맹은 162석 중 160석을 차지한 것이다. 이는 벵골지역을 강타한 볼라 이후 정부를 비판하는 성난 민심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다.  


아와미 연맹이 국회 전체 313석 중 167석이라는 다수석을 확보했기 때문에 그들이 정부를 구성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대략 2월까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3월 1일 오후 야햐가 라디오에서는 3월 3일 열기로 예정된 국회를 연기하고, 국회 재구성을 한다고 발표했다. (p.50)   

 


"이 투쟁은 독립을 위한 투쟁이며, 해방을 위한 투쟁이다" 독립선언을 하는 셰이크 무지불 (1971.3.7) ⓒ방글라데시 독립전쟁박물관


무집-야햐-부토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루머가 퍼졌다. 국회는 이틀 뒤인 3월 25일에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또다시 한차례 연기되었다. (p.47)



1971년 3월 7일, 방글라데시 독립 선언

아와미 연맹이 압승하여 과반의석을 확보했지만, 파키스탄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총선 무효화를 선언했다. 이에 동 파키스탄 전역에서 아햐 칸 정부의 총선 무효화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가 지속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아햐 칸 대통령은 아와미 연맹 당대표인 무지불 라허만과 회담을 갖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회담이 실패로 돌아가자, 1971년 3월 7일 무지불 라허만은 다카에서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이에 파키스탄 정부는 라허만을 체포하고 아와미 연맹의 활동을 금지한다.

  

“선별 처리하라.”
무전기를 통해 명령이 내렸다. 선별 처리하라는 것은 벵골인들을 없애버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단독 명령으로 집단 학살이 시작되었다. (p.63-4)



1971년, 3월 25일, 서치라이트 작전 개시

파키스탄 군은 동 파키스탄의 독립 선언에 대한 보복조치로 1971년 3월 25일 밤 기습적으로 방글라데시 초토화 작전인 ‘서치라이트 작전’을 실시하여 동 파키스탄의 시민과 학생, 지식인 등 비무장한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학살에 반대한 핵심 지휘관 몇 명이 사임하거나 교체되기도 했다.


“고양이나 개 한 마리도 다카에 남아 있을 수 없어.” (p.141)



독립전쟁이 있던 9개월 동안 1천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여 이웃나라인 인도로 유입됐다  ⓒRaghu Rai.



1971년 3월,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1971년 3월 26일 치타공 방송국을 통해서 전면 파업과 함께 동 파키스탄을 방글라데시라는 국호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전쟁을 시작한다. 파키스탄 정부는 군대를 파견해 진압에 나섰고, 방글라데시는 묵띠 파우즈(해방군, ‘묵띠 바히니’라고도 불린다)라는 게릴라 저항군을 결성해 파키스탄의 유혈진압에 맞섰다.


전쟁이 시작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인도로 피난을 갔다. 그 수가 점점 늘어 1천만 명에 육박하고, 인도에 선제공격을 한 파키스탄의 칭기즈칸 작전으로 12월 3일 인도는 이 전쟁에 방글라데시 연합군으로 참전하게 된다. (이 전쟁을 두고 '인도-파키스탄 3차 전쟁'이라고도 한다) 이에 힘을 얻게 된 방글라데시는 12월 16일 마침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벵골어를 사용하는 나라'라는 뜻을 가진 '방글라데시'를 국호로 독립하게 된다.

 

ⓒThe daily Star


전쟁이 끝이 나자, 파키스탄의 야햐 칸 대통령은 하야하여 대통령직을 내려놓는다. 9개월의 전쟁 기간 동안 방글라데시의 민간인 300만 명을 학살되고 20만 명이 넘는 여성을 강간당했다고 알려진다. 또한, 전쟁 포로만 9만 3천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 규모라고 한다.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파키스탄 동부 사령부의 지휘관 아미르 압둘라 칸(Amir Abdullah Khan)과 인도의 중장 자그지트 싱 오로라(왼) ⓒRaghu Rai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소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전명 서치라이트 : 비랑가나를 찾아서> 읽기 (6)에서는 방글라데시 건국,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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