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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PLS 이혜령 Feb 13. 2019

방글라데시 건국, 그 이후

<작전명 서치라이트: 비랑가나를 찾아서> 읽기 (6)


소설 <작전명 서치라이트 : 비랑가나를 찾아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성한 글로, 소설의 시대 배경인 방글라데시의 근현대사를 정리한 글입니다. 1947년부터 1971년까지 방글라데시의 탄생에 대한 글과 방글라데시의 건국 그 이후에 대한 글로 구성된 두 글 중 마지막 글입니다.  

방글라데시의 근현대사② 방글라데시 건국, 그 이후 (독립 ~ 현재)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을 쟁취했지만,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컸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인도로 피난 간 사람들 가운데 많은 지식인들이 방글라데시로 돌아오지 않아 고급 인력의 손실 또한 막대했다. 사이클론 및 홍수 등 자연재해도 여전하여 새로운 국가의 국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못했다. 새로운 국가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최빈곤 국가라는 오명을 얻게 됐다.


새로운 국가의 지도자들은 동파키스탄 시기 중앙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탓에 경험이 부족했다. 국정 운영에 미숙했고, 부정부패 또한 만연해 정치적 혼란은 지속됐다. 이러한 혼란 속에 20여 차례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고 그중 3번이 성공하여 정권이 교체됐다. 이 과정에서 2명의 최고 지도자가 암살됐다(초대 대통령 세이크 무지불 라허만이 1975년 암살되었고 그의 후계자 지아울 라허만 역시 1981년에 암살되었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극단적인 정치 대립 상황과 테러, 종종 폭력시위로 변질되어 버리는 ‘하딸’이라는 동맹파업 등 방글라데시의 혼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셰이크 무지불 라허만 (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 초대 대통령)


전에 다카는 그저 지방의 수도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새로운 국가의 심장이다. 심지어 돕기 위해 온 외국인들도 이 도시를 주목한다. 곡물의 가격과 함께 집세 또한 치솟았다. 다카의 땅은 귀금속처럼 가치 있게 되었다. (p.335)



1972~1975년, 셰이크 무지불 라허만 정권

1971년 12월 다카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1972년 1월 8일, 독립선언을 해 파키스탄으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던 아와미 연맹의 대표 셰이크 무지불 라허만이 석방되어 방글라데시로 돌아왔다. 무지불 라허만은 신생국의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1972년 1월 11일 라허만은 새 국가의 임시 의회를 수립하고 사회주의 경제, 비동맹 중립노선 선언한다. 낙태를 허용하는 특별법 통과하고, 20만 명의 전쟁 강간 피해자 '비랑가나'를 위한 재활 프로젝트(1972~76년, ▶식품, 건강 보조기구, 기타 용품 등 구호 물품 지급 ▶지차 금(1만 따까) 지원 및 중매를 통한 결혼 지원 ▶직업 훈련 및 취업 알선 ▶낙태 허용 및 해외입양)를 실시하며 전쟁에 대한 수습을 시작하며 경제를 챙겼다.



아기들은 해외에 보내는 것이 주요 사업이었다. 외부에서 돈이 왔고,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음식들과 재봉틀이 담요, 우유, 죽, 옷들과 함께 도착했다. 남편들에게 거부당하고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내쫓기고 아무런 장래 희망도 없는 이들 빈 자궁의 여자들이 세탁기를 돌리고 빵을 굽고 옷을 만들고 수를 놓아 손수건과 베개를 만들었다. 이것이 가난한 나라의 재활 프로젝트였다. (~중략~) 그들은 대나무와 황마와 같이 쉽게 손에 닿는 비싸지 않은 것들로 일용품들을 만들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도왔다. (p.278~279)


"한 명당 1만 따까의 지참금이 소비되었죠. 방가반두의 아내 자신도 재봉틀 같은 가정용 기기들, 가구들을 모두 장만해 갔어요. 지참금 때문에 결혼한 남자들은 동만 가지고 아내들은 데려가지 않았어요. 아내들을 집으로 데려간 사람들도 그들을 매번 모욕 주기 위해 데려갔어요." (p.280)



1973년, 헌법 선포

새로운 국가를 위한 헌법이 제정하고, 토지개혁 및 빈곤 퇴치를 위한 국가 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라허만은 미국과 유럽, 기타 국가들을 순방하며 광범위한 경제적, 인도적 지원을 약속받았고, 인도의 총리 인디라 간디와 가까운 우정을 맺으며 인도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하자, 무지불 라허만의 아와미 연맹은 절대다수의 지지층을 확보하게 되었다.


평생에 두 번의 기근이라니. 하나는 영국 정부에 의해 조작되었고 다른 하나는 쌀 수출을 멈춘 미국인에 의해 촉발되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에 대한 부자 나라들의 얼마나 무자비한 복수인가? (p.369)


1943년, '벵골 홀로코스트' 벵골 대기근

1943년 벵골지역에 발생한 대기근으로 300~500만 명의 목숨을 잃는다. 홍수나 가뭄 등 특별한 자연재해가 없는 상태에서 발생한 대기근을 조사하던 역사학자 무케르지는 영국군이 작성한 비밀문서를 발견하게 된다. 이 문서에서 대기근이 영국의 처칠이 지시한 영국의 쌀 수탈 정책 때문에 일어난 인위적인 참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인도 내륙 공습을 우려한 영국은 인도 벵골지역의 쌀을 모두 거둬갔다. 영국은 벵골지역에서 쌀을 수탈해간 것뿐만 아니라, 인도의 긴급구호식량 지원을 무시하고 다른 국가에서 제안한 인도주의적 쌀 지원도 이런저런 핑계 끝에 거부하였으며, 항구마저 봉쇄해버렸다. 결국 벵골지역의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이후, 영국은 이와 관련된 모든 문서를 파기하여 공식적인 역사에서 삭제하려 했지만, 2010년 역사학자 무케르지가 저서 <처칠의 비밀전쟁>을 통해 폭로하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다.


1974년, 벵골 대기근과 독재의 시작

1974년 대홍수가 발생하고 다시 벵골 지역에 대기근이 발생해 150만 명의 목숨을 잃었다. 1943년 벵골 대기근 이후 다시 기근이 불어닥치자 상인과 부유층이 곡물 사재기를 하는 바람에 먹을 것을 구하기가 어려워져 피해가 커진 것이다. 이로 인해 라허만의 국가 경제 운영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쳤고, 지방 정부에 대한 통제력도 상실했다. 무지불 라허만에 대한 지지도가 크게 떨어졌다.


무지불은 이 정치적 위기사태를 돌파할 목적으로 1975년 1월 25일 모든 야당의 활동을 금지하는 헌법 수정안 통과하고 스스로 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유일한 헌법 정당인 BAKSAL (Bangladesh Krishak Sramik Awami League, 방글라데시 농민 노동자 아와미 연맹) 창당한다. 이로 인해 아와미 연맹과 군부 내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칼레드 모샤라프가 이끄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는 아와미 연맹 지지자이며 친인도 쪽이라는 말이 있었다. 방가반두의 암살범들은 그날 밤 재판의 주선도 없이 항공편을 통해 방콕으로 보내졌다. (p.445)


1975년, 암살된 방글라데시의 국부

방글라데시 국부로 추앙받던 무지불 라허만 대통령은 4대 대통령 취임 중인 1975년 8월 15일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결국 가족과 함께 암살된다. 그 당시 독일에 유학 중이던 현재 방글라데시 총리인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와 레하나만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무지불 라허만을 지지하던 군부 측에 의해 다시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바로 진압되었다.)

방글라데시 화폐에는 초대 대통령인 무지불 라허만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비극적으로 삶을 마친 셰이크 무지불 라허만은 현재까지 국민의 친구라는 의미의 ‘방가본두’라고 불리며 방글라데시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그가 태어난 3월 17일과 그가 암살당한 8월 15일이 국경일로 지정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지아울 라허만 (Ziaur Rahman, 1936-1981, 7대 대통령)


1975~1981년, 지아울 라허만 정권

무지불의 죽음으로 방글라데시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지만, 12월 계엄령하에 지아울 라허만 육군 참모총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수습된다. 1978년, 6대 대통령인 모하메드 사옘 대통령이 쿠데타로 사임한 이후 라허만이 7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라허만은 같은 해 9월 BNP(Bangladesh Nationalist Party,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을 창당한다.  


라허만은 전반적인 대중의 신뢰를 얻고 있었지만, 쿠데타에 대한 대비로 집권 초기 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 검열 및 무자비한 숙청과 무리한 개혁을 감행하여 그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이 늘어났다. 결국 지아울 라허만도 1981년 5월 30일, 치타공에서 경호원 6명, 측근 2명과 함께 육군 장교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후세인 무하메드 에르샤드 (Hussain Muhammad Ershad, 1930-, 9대 대통령)

1982년~1990년, 후세인 모하메드 에르샤드 정권

1982년 3월 24일 다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계엄령이 선포된다. 에르샤드 육군 참모총장이 계엄 사령관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8대 대통령(Ahsanuddin Chowdhury 대통령)을 임명한다. 그리고 다음 해 1983년, 군사 정권을 수립하고 스스로 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1986년 10월 선거를 실시하는데 국민 직선을 통해 재선에 성공하자, 한 달 후 계엄령을 해제한다. 하지만 에르샤드는 1987년부터 이어진 에르샤드 정권 퇴진 운동으로 인해 1990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1988년 후세인 모하메드 에르샤드는 이슬람을 국교로 선언했다. (p.461)


에르샤드의 퇴진 운동이 시작되었다. 파업과 동맹 휴업이 일어났다.
(~중략~) 다카에 폭동이 일어났는데 바브리 사원에 대한 공격이 있을 거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매리엄과 아누팜은 둘 다 드바시시 때문에 걱정했다. 정부는 온종일 힌두 재산인 주택과 상업용 시설물들의 파괴나 약탈, 방화를 허락했다. 그리고 저녁 통행금지가 발표되었다. (p.472-3)


베굼 칼레다 지아(Begum Khaleda Zia, 1945.8.15-)  ⓒDhakatribune


1991~1996년, 베굼 칼레다 지아 정권

베굼 칼레다 지아는 1981년 남편인 지아울 라허만이 피살당하자, 정치에 나서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군사정권에 맞서 싸웠으며, 1986년에는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1991년 2월 27일, 군사 정권이 무너지고 실시한 총선에서 BNP당은 200석 중 140석 획득하여 제1당으로 부상하게 된다. 3월 20일, BNP의 대표인 베굼 칼레다 지아가 최초의 여성 총리로서 신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 개헌이 국민투표로 통과되면서 방글라데시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1993년, 아와미 연맹의 하시나 대표(셰이크 무집의 딸, 81년 귀국)가 전범자에 대한 특별재판을 요구했지만 지아 총리가 반대하면서 지아 정권은 야당과 사사건건 충돌하기 시작했다. 특별법 공방 끝에 야당은 94년 3월 등원 거부와 함께 지아 총리 퇴진 및 중립내각 구성을 요구하고, 94년 말에는 아와미 연맹, Jatiya Party(국가당) 및 Jamaat-e-Islami 등 야당 의원 전원 147명이 의원직을 총사퇴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결국 지아 총리가 중립 과도정부 하에서 선거를 실시한다고 합의했지만, 약속은 무시하고 1996년 2월 15일,  BNP단독 총선을 실시한다. 이에 하시나 AL 당 대표는 ‘중립내각이 관리하는 새로운 총선을 90일 내에 실시하라’고 요구하며 무기한 장외투쟁에 돌입한다.

결국 지아 총리가 사임하고 국회는 해산한다.



셰이크 하시나 (Sheikh Hasina, 1947.9.28.-,현 방글라데시 총리)


1996~2001년, 셰이크 하시나 정권

1996년 6월 12일 실시한 제7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셰이크 하시나가 이끄는 아와미 연맹이 승리하게 되고 6월 23일, 셰이크 하시나가 총리로 취임한다. (Awami League 146석, BNP 116석, Jatiya Party 가 32석, Jamat-e-Islam 3석, 기타 3석을 각각 확보)



2001~2006년, 베굼 칼레다 지아 정권

5년 뒤 2001년 10월 총선에서 BNP가 승리 (BNP 196석 획득)하면서 칼레다 지아가 다시 총리에 재취임한다. 하지만 2006년 10월, 다음 총선을 위한 임시정부가 들어서지만, 군부 쿠데타로 BNP 정권이 물러나고 군부는 비상 계엄령을 선포한다.  2007년 1월 22일 예정되어 있던 총선이 1월 11일, 국가비상사태 선언으로 중단된다.



2007~2008년, 과도 중립내각

2007년 1월 12일, 군부의 지지와 영향 하의 임시정부가 들어선다. 임시정부는 정확한 신분확인을 투표권자에 대한 ID카드 발급을 통한 부정선거 없는 2008년 총선 약속하며, 선거 제도 개혁과 부패 청산, 정치 및 정당 개혁과 함께 민생 안전에 총력을 기울인다.



2009~현재, 셰이크 하시나 정권 (2014, 2018년 총선으로 3 연임)      

비상사태가 해제되고 2008년 12월 29일 실시된 제9대 총선에서 셰이크 하시나가 이끄는 아와미 연맹이 승리(총 300석 중 230석을 획득)한다. 2009년 1월 6일, 셰이크 하시나가 제12대 방글라데시 총리로 취임하면서 비상사태 선포 이후 23개월간 지속됐던 임시 과도 정부 체제에서 정상적인 민선정부로 복귀한다. 그리고 정부는 2011년 5월, 총선 기간의 “중립 임시정부제도” 폐지한다. 1996년, 2001년, 2008년 중립 임시정부가 들어서 총선을 감독했었다.



전범재판과 극단적인 정치 대립

하시나 정부는 2010년 전범재판소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의 전범자들에 대한 재판을 시작한다. 파키스탄군의 학살과 강간, 고문 등을 도운 혐의로 주요 지도자들을 기소하여 재판에 회부됐다. (이전에도 전범자에 대한 재판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수사나 기소가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2008년에는 국제인권단체인 앰네스티가 전범죄에 대한 불처벌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사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2013년, 첫 판결이 유죄로 선고되고 이후 판결에서도 사형과 종신형, 징역 90년이 선고된다. 모두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야당 지도자로 전범 처벌을 빌미로 야권 인사에 대한 '정치탄압'이라 주장하며 야권은 반발했다. 야권 지지자들이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5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2014년 1월, 10대 총선 하시나 정부 연임 성공 

야당과 그의 지지자들은 전범재판에 대한 반발과 다음 총선을 위한 과도 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도로와 철로, 수로를 봉쇄(blockade)하고 총 파업과 총선 반대 야당 연합 무기한 투쟁에 나서며 투쟁을 강화한다. 2014년 1월 5일, 10대 총선은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치러져 예상대로 집권 아와미 연맹이 압승을 거뒀다(AL 234석 획득, 제1야당 BNP 및 Jamaat-e-Islami 불참). 야권은 반쪽짜리 부정선거를 백지화하라고 정부에 요구하며 또다시 총파업과 논스톱 '봉쇄'를 이어가면서 정세 불안이 수개월간 지속됐다.



계속되는 테러

전범재판 이후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 상태로 인한 방글라데시 내 정정 불안정 상태가 세계적인 IS 이슈와 맞물려 세속적인 성향의 블로거 및 활동가, 언론인, 외국인 등을 향한 테러가 늘어났다. 2015년부터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연이어 발생했다. 그러다 2016년 7월 1일, 수도 다카의 식당 '홀리 아티산 베이커리'에서 일본인과 이탈리아인 등 외국인을 포함한 민간인 20명과 경찰 2명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테러가 발생한다. IS는 최근 외국인 대상 테러나 다카 테러의 배후로 자처했지만, 방글라데시 정부는 방글라데시 내 IS의 존재를 부정했다.


방글라데시 정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 테러는 방글라데시 외교 구역에 대한 최초의 공격으로, 방글라데시는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저렴한 노동력으로 성장을 견인해왔던 방글라데시의 의류업뿐 아니라, 원조사업 및 개발사업으로 파견되었던 일본 원조기구인 JICA를 시작으로 수많은 NGO들이 안전상의 이유로 철수한다.  


테러가 있었던 홀리 아티산 베이커리 ⓒthe daily star

야당과의 불화로 정치적 불안도 지속됐다. 하지만 여당의 강력한 야당 탄압으로 전 칼레다 지아 총리(지아는 총리 재임 중 배임 혐의로 기소된 상태이며 2018년 2월, 징역형을 선고받아 수감 중이다.)를 비롯한 야당 주요 인사 다수가 검거되면서 표면적으로는 정정이 안정되며, 대규모 시위 등은 대폭 감소한다.



2018년 제11대 총선, 하시나 수년째 집권

2018년 12월 30일, 방글라데시 제11대 총선이 노골적인 야당탄압과 언론 통제 등 부정선거와 유혈사태의 논란 속에 아와미 연맹이 승리하여 다시 하시나가 총리로 연임됐다. 야당 측은 이번 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력 반발하며 선거 결과에 불복하여 재선거 요구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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