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서치라이트: 비랑가나를 찾아서> 읽기 (3)
이 글은 소설 <작전명 서치라이트 : 비랑가나를 찾아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설 속에 나오는 주요 용어 및 실존 주요 인물을 정리한 글입니다.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1971년 3월 26일에 발발한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 사이에 발발한 전쟁이다. 동파키스탄의 승리로 같은 해 12월 16일 끝이 났다. 독립전쟁에 승리한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한다.
독립전쟁이 있던 9개월 동안, 이를 진압하려는 파키스탄군과 파키스탄과 통합을 주장하던 그의 지지자들은 민간인 300만 명을 학살하고 20만 명이 넘는 여성을 강간한 것으로 알려진다.
“선별 처리하라.”
무전기를 통해 명령이 내렸다. 선별 처리하라는 것은 벵골인들을 없애버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단독 명령으로 집단 학살이 시작되었다. (p.63-4)
서치라이트 작전 (Operation Searchlight)
파키스탄 군은 동파키스탄의 독립 선언에 대한 보복조치로 1971년 3월 25일 밤 기습적으로 방글라데시 초토화 작전인 ‘서치라이트 작전’을 실시하여 비무장한 민간인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학살에 반대하며 핵심 지휘관 몇 명이 사임하거나 교체됐다.
비랑가나(Birangana)
‘용감한 여성’, '여성 여웅'이라는 뜻으로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인 세이크 무지불에 의해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에서 여성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강간 생존자들에게 붙여진 호칭이다.
묵띠 바히니(Mukti Bahini, the freedom fighters, 해방군)
1971년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에서 파키스탄 군에 맞서 싸운 민간 게릴라 저항군으로 초기에는 '묵띠 파우즈(Mukti Pauj)'로 불렀다.
라자까르(Razakar)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파키스탄 군대에 의해 조직된 반방글라데시 불법 무장 단체로, 파키스탄 지원 의용군을 말한다. 전쟁 동안 하도 많은 악행을 저질러 배신자를 뜻하는 경멸적인 뜻으로 쓰인다.
비하리인
‘오도가도 못하게 된 파키스탄인’, 인도 비하리 주 출신의 이슬람교도들로, 1947년 인도 대분할 시 동ㆍ서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
Shaheed Minar(샤히드 미날)
파키스탄의 벵골어 말살 정책에 대항해 싸우다가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희생된 이들을 기리고자 세운 추모비로, 각 지역의 대학 캠퍼스와 마을의 입구에 세워져 있다.
조이 방글라 (Joi Bangla)
1971년 방글라데시의 독립 전쟁 때 자주 쓰인 구호로 ‘방글라데시에 승리를’이라는 뜻이다.
BAKSAL
무지불 라허만 대통령 재임 시절인 1974년 1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벵골 기근으로 지지도가 크게 떨어져 정치적 위기사태를 맞이한다. 이를 돌파할 목적으로 1975년 1월 25일 모든 야당의 활동을 금지하는 헌법 수정안 통과하고 유일한 헌법 정당인 BAKSAL 창당한다.
아와미 연맹이 국회 전체 313석 중 167석이라는 다수석을 확보했기 때문에 그들이 정부를 구성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대략 2월까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3월 1일 오후 야햐가 라디오에서는 3월 3일 열기로 예정된 국회를 연기하고, 국회 재구성을 한다고 발표했다. (p.50)
아와미 연맹(Awami League, 약칭 AL)
현재 방글라데시의 집권여당으로 방글라데시의 정당 가운데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정당이다. 1954년에 창당했으며, 동ㆍ서 파키스탄 시대에 정치적으로 우세했던 서파키스탄의 차별정책에 맞서 동파키스탄의 이익을 대변했다. 1971년에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면서 연립 정당이 없는 제1당으로 정권을 잡았다.
세이크 무지불 라허만(초대 대통령), 지아울 라허만(7대 대통령), 후세인 무하메드 에르샤드(9대 대통령)
그(세이크 무집)는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파키스탄의 총리가 되는 꿈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그는 국민에게 모든 가정을 요새로 만들고, 생생히 살아 있는 운동을 유지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 야햐, 부토와 함께 대통령 궁에서 마치 물고기를 사듯이 흥정과 거래를 하고 있다. (p.43)
칼레드 모샤라프가 이끄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는 아와미 연맹 지지자이며 친인도 쪽이라는 말이 있었다. 방가반두의 암살범들은 그날 밤 재판의 주선도 없이 항공편을 통해 방콕으로 보내졌다. (p.445)
셰이크 무지불 라허만 (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
방글라데시 초대 대통령과 총리를 역임한 방글라데시 정치인으로, 국민의 친구라는 의미의 ‘방가본두’라고 불리며 방글라데시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이름은 줄여서 '셰이크 무집'으로도 불린다. 그의 탄생일은 방글라데시의 국경일이다.)
동ㆍ서 파키스탄 시대에 서파키스탄의 차별정책에 맞서 AL의 셰이크 무지불 라허만 당대표는 납세거부운동과 벵골 자치운동을 이끈다. 1971년 3월 7일 방글라데시 독립을 선언한 이후, 파키스탄 군부에 의해 체포된다.
독립 이후 초대 대통령과 2대 총리를 거쳐 4대 대통령 취임 중 1975년 8월 15일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결국 가족과 함께 암살된다. 그 당시 독일에 유학 중이던 현재 방글라데시 총리인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와 레하나만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8월 15일을 추모의 날로 정해 셰이크 무지불 대통령과 그의 가족의 넋을 기리고 있다.)
그의 딸인 셰이크 하시나가 현재 방글라데시의 총리를 수년째 역임하고 있다.
반군들의 라디오 방송인 스와딘방글라베타의 방송을 틀어놓는다. 청취자들은 순수한 흥분으로 숨을 멈추고 하지 샤힙의 심장은 방망이질을 한다. 독립 선언문이 낭독된다.
"나, 지아 장군은 우리의 위대한 국가 영도자 방가반두 세이크 무집 라만을..."
이제 전쟁은 일방적이지 않은 것이 분명해졌다. 이 지아 장군은 누구인가? 그리고 하지 샤힙은 결국 어느 쪽인가? (p.77)
지아울 라허만 (Ziaur Rahman, 1936-1981)
독립전쟁 당시 셰이크 무지불 라허만이 체포되자, 지아울 라허만이 방송을 통해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6대 대통령인 모하메드 사옘 대통령이 쿠데타로 사임한 이후 라허만이 7대 대통령이 되었다. 라허만은 전반적인 대중의 신뢰를 얻고 있었지만, 쿠데타를 대비하여 집권 초기 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 검열 및 무자비한 숙청과 개혁을 감행하여 그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이 많았다. 1981년 5월 29일 치타공에서 경호원 6명, 측근 2명과 함께 육군 장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1988년 후세인 모하메드 에르샤드는 이슬람을 국교로 선언했다. (p.461)
에르샤드의 퇴진 운동이 시작되었다. 파업과 동맹 휴업이 일어났다.
(~중략~) 다카에 폭동이 일어났는데 바브리 사원에 대한 공격이 있을 거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매리엄과 아누팜은 둘 다 드바시시 때문에 걱정했다. 정부는 온종일 힌두 재산인 주택과 상업용 시설물들의 파괴나 약탈, 방화를 허락했다. 그리고 저녁 통행금지가 발표되었다. (p.472-3)
후세인 무하메드 에르샤드 (Hussain Muhammad Ershad, 1930-)
방글라데시의 9대 대통령으로, 83년 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7년간 집권한 군부 독재자로 알려져 있다. 1990년 에르샤드 정권 퇴진 운동으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과거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현재까지도 정치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정치인이다.
(방글라데시는 후세인 무하메드 에르샤드 대통령 사임 이후, 1991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 개헌했다.)
군대는 발루치스탄(Baluchistan, 옛 영국령 인도 서부의 토후국, 현재는 파키스탄에 병합되었다)의 도살자, 티카 장군이 이끌고 있었다. 그의 총알은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 하나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는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p.51)
티카 칸 계엄사령관 (1915-2002)
1971년 3월 7일 부임한 동파키스탄 계엄사령관으로 방글라데시 초토화 작전 서치라이트 작전의 기획자다. 방글라데시에서 벌인 잔혹한 학살 때문에 발루치스탄의 도살자라고 불렸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 (Zulfikar Ali Bhutto, 1928-1979)
파키스탄의 정치인으로 제4대 대통령(1971-73), 제9대 총리(1973-77)를 지냈다.
1971년, 서파키스탄이 전쟁에서 패하고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하자, 야히야 칸 대통령이 하야하고 부토가 12월 20일 4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이후 1973년 내각책임제의 헌법으로 바뀌면서 9대 총리가 되었다. 부토 정권은 1977년 쿠데타로 전복되고, 1979년 부패와 살인죄로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리고 같은 해 부토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됐다.
그의 딸, 베나지르 부토 역시 아버지에 이어 정치에 입문하여 두 차례 총리를 지냈으나, 2007년 12월 27일 암살당한다.
방글라데시의 국기
방글라데시의 국기는 1972년 1월 17일 공식 제정되었고, 독립전쟁 당시 사용했던 기를 기초로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초록색 바탕에 붉은 원이 중앙에서 살짝 왼쪽에 위치해있는데, 초록은 젊은이들의 의지와 방글라데시의 풍요로운 대지를 뜻하고, 붉은 원은 독립을 위해 흘린 피와 벵골 지방에 떠오를 태양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주 심플한 모양의 국기이지만, 독립전쟁 당시 희생되었던 넋들을 기리고, 신생 국가의 의지, 방글라데시의 자연을 모두 담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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