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4학년, 왼쪽 눈은 가장 큰 글씨를 볼 수 없었다. 담임 선생님과 반 친구들은 적잖이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담임 선생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병원을 가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안과나 안경점이 전무한 산골이라 심각한 눈 상태를 확인하려면 인근에서 가장 큰 도시로 가야 했다.
첫 진료를 가는 날, 태어나 자란 산골을 처음 벗어난 그날은 10살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날이었다. 학교를 결석하는 큰 일도 감행해야 했고, 시외버스의 덜컹거림과 고약한 멀미를 참아야 했고, 평소에 엄두를 낼 수 없는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갖가지 접수를 거쳐 2층 안과 복도에서 대기 중이었을 때 그 길고 반듯하고 게다가 적막한 병원 복도가 마냥 신기하고, 긴 빼곡히 의자마다 앉아있는 사람들의 사연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각종 검사를 받고 나서 선천성 약시와 난시, 근시 진단을 받았다. 평생 안경을 써야 하고, 성장기가 끝날 때까지는 6개월에 한 번 정기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당시에 안경을 쓴 친구는 거의 전무할 때라 안경을 쓴다는 것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엄마는 6개월마다 외지로 나와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 것에 큰 걱정이었지만 다른 방도는 없었다.
나의 안경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물론, 안경을 쓰는 불편함과 [안경 재비]라는 별명이 한동안 따라다녔지만 안경을 쓴다는 일은(6개월에 한 번씩 도시의 안과를 간다는 일) 유년 시절 나에게 큰 선물이었다. 남동생 셋을 둔 큰 딸로 늘 의젓해야 했던 내가 엄마와 단둘이 낯선 도시를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는 내 생애 가장 달콤한 외출이었다. 더불어, 더 큰 세상을 꿈꾸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오랜 세월 안경을 쓰면서 겪은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안경을 쓰는 사람들은 누구나 아는 그런 불편함은 차라리 익숙해졌다. 안경 쓴 여자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택시 승차 거부당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적도 있었다. 시력과 시선과 시각은 엄연히 다른데 대부분 시력으로 치부해 버리는 상황도 더러 있었다. 코로나 시절 마스크와 안경의 더부살이는 고역이었다.
신체적인 부대낌도 있었지만 한편에는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평생 나를 규정짓는 알 수 없는 그 무게감을 안경에 뒤집어 씌웠다. 익숙한 삶에 젖어서 그저 수긍하고 사는 삶에서 변화를 주고 싶었다. 평생 숙원이었던 안경 벗기도 시도하지 못한 채 사는 삶이 좀 지루하다고 하면 될까? 무언가 비워내고 덜어내고 가벼운 삶을 살고 싶었다고 할까?
암튼,
분신 같았던 안경을 벗고 세상을 보기까지는 5분 정도면 충분했다. 평생의 프로젝트가 너무 싱겁게 끝나버렸다. 렌즈삽입술의 경험은 낯설고 생경했지만 안경 없이 세상을 보는 이 낯섦보다 약한 것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