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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이 Jun 05. 2020

하이디의 다락방을 꿈꾸며

                                                                                                                                                                          삶이 고단할수록 정리 정돈에 매달렸고 맘이 아플수록 기록하는 일에 집착하였으며 세상살이에 자신이 없을수록 따지고 들었다.


빨래는 종류별로 색깔별로 분류해 빨고 널고 빨고 널고, 걸레를 수건이라고 착각할 만큼 빨래를 해댔다.

20년 동안 세탁기만 4대째 구입했다.

나사, 일회용 스푼, 클립, 단추들이 제 집에 얌전히 앉아 있고 모두가 라벨지로 인쇄된 이름표를 달고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써온 다이어리와 가계부, 일기장에는 누구와 어디서 만났는지, 누구랑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10년 전 김장은 어디에서 주문했으며, 몇 kg를 얼마에 샀는지, 12년 전 이사 비용은 얼마였는지 낱낱이 적혀 있고 눈물을 흘리며 콧물을 훔치며 쓴 날것의 감정들이 널뛰고 있다


각종 명세표를 매의 눈으로 샅샅이 지켜보다 부당, 과다한 요금이 나오면 반드시 되물어 따져 되돌려 받았고

약속한 시간과 원칙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다.


날을 바짝 세우고, 가시를 돋우고 살면서도 한편으로는 허기진 삶을 메우기 위해 촘촘히 쪼개진 스케줄로 종종걸음 치고, 허전한 맘을 달래기 위해 주변의 사람들과 돌아가며 약속을 잡았다.

마음의 허기와 일상의 분주함은 다른 궤도를 달리는 열차 같았다.


예민한 촉수를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 스스로도 힘들지만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한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모두를 조마조마하게 했다.

언행일치라는 미명 아래 스스로에게 지나친 잣대를  들이댔다. 정작 스스로는 내면의 소리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면서 감정을 뭉개는 말, 감정이 숨겨진 말을 들으면 거슬렸다. 


오래된 지병 같은 삶의 방식이라 쉽게 고쳐지지가 않고 세상에 한발 물러서는 느낌이 싫어 고집했던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지고 싶다. 서로를 해치는 이 몹쓸 예민함과 까칠함을 벗어나 그러려니 혹은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느슨한 삶을 살고 싶다.

마음 깊이 숨어있는 보드라운 마음을 내보이고 싶다.


어릴 적 자란 산골 고향에서 철마다 내뿜는 자연의 빛깔과 향기가 떠오를 때면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된 것처럼 몸도 가볍고, 마음은 더 가벼워진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친구들과 털썩 주저앉아 공기놀이를 하고 나무 밑동에 꼬물거리던 작은 곤충들과 장난치고

나무 열매 아름 따다가 먹던 그 기억들이 떠오를 때면 두꺼운 갑옷을 둘렀던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그때만큼은 더 이상 따지는 것도, 재는 것도 없고, 규칙 속에서 맴돌지 않았다.


계절마다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반겨주는 나무들의 기다림이 더없는 위로가 된다. 그 위로를 거름 삼아 스스로 매어놓은 올가미를 이제는 벗어버리고 싶다.


알프스가 그리워 몽유병에 걸린 하이디가 알프스의 대자연에 돌아와 마음의 병을 고친 것처럼 당장이라도 하이디 다락방을 짓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내 이름 밑에 매달린 고드름이 아직 떨어지기 전이므로

내 마음 울창한 숲 속에 소박하게 자리한 외딴 다락방에 당분간 만족하려고 한다.


느슨한 삶의 나무를 키워낼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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