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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이 Jun 15. 2020

아버지의 생을 품은 고사리

  

“어제 고향에 다녀온 꿈 꿨다”

“한번 다녀오고 싶은가 보네. 언제 갈까?”

“좋아!”

"나도"

“나도 가고 싶다”

[카톡. 카톡] 고향 친구들의 단톡 방이 요란하다. 

고향은 언제든지 갈 수 있지만, 선뜻 나서기 힘든 곳이다.  모두가 떠나고 폐허만이 남은 폐광촌이기 때문이다. 내 유년의 풍경이 사라지고,  멈춰버린 시간의 상처가 박제처럼 남은 동네이다. 그곳을 고향으로 둔 이들 모두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갈수록 깊어지는 후유증을 앓는 중이다.

멈춰버린 시간

고향은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1916년 일제 강점기 시대에 중석 광산이 발견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영기업인 대한중석 광업소가 있던 곳이다. 단일 규모 중석 광산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고 세계 중석 시장의 8%,  수출액의 80%를 차지한 산업화 시대 최전선이었다. 

정부와 대한중석이 합작 투자하여 포항제철을 설립했고, 최초의 실업 축구팀이 있었던 막강한 자금과 영향력을 가진 광산 도시였다. 상동은 한국의 엘 도라도였다. ‘골드 러시’의 꿈을 안고 전국 각지에서 광산 일을 하려고 몰려들었다. 아버지 역시 1970년 소문을 듣고 충남 보령의 고향을 떠나 일가친척 하나 없는 상동에 자리를 잡고 광업소에서 다이너마이트로 갱도를 발파하는 일을 시작했다. 외딴 산간오지였던 상동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사람들 덕분에 호황일 때 인구가 4만 명에 달했고, 초등학생 수가 2,000명에 달했다. 병원과 극장이 있었고, 연쇄점, 기숙사와 같은 문화복지시설을 갖춘 번영의 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주민 1,000여 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인구수가 적은 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상동광업소


고향은 땅 속에 묻어두었던 중석을 내어주고 이제는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갔다. 본래의 인적 드문 산간 오지 그대로의 모습으로 고향을 지켜내고 있다.

상동 칠랑이골 이끼계곡




술을 일절 입에 못 대는 아버지는 근무가 없는 날이면 쉴 법도 하셨지만, 열매와 나물을 채취하러 산에 다니는 일이 유일한 취미였다. 특히 봄에 나는 고사리로 묵나물을 만드는 일을 매년 하셨다. 아침 일찍 엄마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 산나물을 자루 가득 싣고 돌아오셨다. 

돌아오자마자 엄마는 집 앞 공터에 큰 가마솥을 걸고 펄펄 끓는 물에 고사리를 삶아 데쳐 냈다. 데친 나물을 봄볕에 바짝 말리기 위해서는 사택 공중변소 슬레이트 지붕이 안성맞춤이었다. 슬레이트 지붕에 올라가는 일은 몸집 작은 내 몫이었다. 얇은 슬레이트 지붕이 깨져 변소로 빠질까 봐 몸서리치면서도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가 고사리를 펼치고, 거두는 일을 해야 했다. 동네 사람들은 먹을 만큼만 하지 뭘 그리 많이 꺾어오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고, 고사리나물 맛보다는 나물 위에 올려진 깨소금이 더 맛있었던 어린 나 역시 투덜거렸지만, 아버지의 고사리 사랑을 말릴 사람은 없었다. 


널고 말리고 걷고 하는 그 과정을 여러 번 거친 여린 고사리는 바짝 마른 짙은 고동색 묵나물이 되어 한 타래씩 묶어졌다. 온 가족의 품이 많이 든 나물들은 삼양라면 상자에 켜켜이 포개어져 해마다 다른 지역의 친척들에게 한 상자씩 보내졌다. 

“우리 식구가 고생해서 만든 건데 왜 다 친척들한테 보내는 거야?” 나의 볼멘소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곳에 계시는 내내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과 친구들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지만, 그곳의 어른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 생존과 생계를 위해 광산촌으로 이주한 이방인들이었다.  

어린 우리들에게 산골은 세상 전부였다. 보이는 하늘이 천평뿐이라 천평리라는 이름이 있을 만큼 산골의 하루하루는 단조로웠지만 대체로 평온했다. 

그러나 어른들은 가장의 목숨을 담보로 나오는 봉급으로 위태롭게 버텨내는 삶이었다. 광업소는 3교대 24시간 노동자들로 인해 돌아가고 있었다. 해발 700미터 산간 오지 마을의 아침은 더디고 밤은 깊었으나 지하 갱도는 낮밤이 따로 없었다. 광업소 갱도가 무너져 인명사고가 일어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출근길 통근 버스 앞으로 여자가 지나가면 안 된다는 불문율도 있을 만큼 모두들 안전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활했다. 구급차 소리가 울리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일시정지가 된 듯이 긴장했고, 사고가 나던 날 동네 분위기는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아주 서늘하고 서글펐다. 광산 사고로 가장을 잃은 친구네와 이웃이 그곳을 떠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고, 누구도 원치 않았던 이별을 받아들여야 했다. 


소박한 만찬 - 닭개장


가장들이 오로지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조부모 봉양, 육아와 살림 그리고 부업까지 다 해내야 했던 엄마들은 네 집 내 집이 없이 서로 도와가며 삶을 꾸려갔다. 궁벽한 산골이라 다른 일거리가 없었다. 어쩌다 수출품 편물 뜨기 부업이 동네에서 시작되었다. 엄마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하루 종일 뜨개질을 하셨다. 뜨개질하다가 밥때가 되면 다 같이 음식을 해서 나눠 먹는 일이 자주 있었다.

모두가 타향살이 중인 동네 사람들은 음식으로 외로움을 나누고 그리움을 채웠다. 특히 동네에서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면 엄마들이 의기투합하여 공터나 운동장에 가마솥을 걸고 닭개장을 끓였다. 겨우내 처마 끝에 매달려있던 시래기와 봄부터 말린 고슬한 고사리와 내 손목만큼 굵은 대파를 넣어 닭개장을 끓였는데 그때 아버지의 고사리는 닭개장의 일등공신이었다.


바짝 말린 채 얽혀 있는 타래를 풀어 물에 불린 고사리는 다시 오동통해져서 봄의 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봄의 고사리와 가을의 시래기로 오래 끓인 붉고 진한 닭개장은 척박한 그곳의 자연과 시간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곳 사람들을 먹고살게 하는 일도, 마음의 보약을 주는 것도 모두 자연의 일이었다. 노동의 깊은 고단함과 불안함을 함께 버텨내는 이웃들과의 소박한 만찬이었다. 또한 만남과 이별의 자리나 야유회와 체육대회에도 빠지지 않은 축제의 음식이었다. 식솔의 생계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삶의 거친 현장을 버텨내는 이들과 나눠 먹는 뜨거운 한 그릇의 닭개장은 타향살이의 위로이고 구원이었으리라.


우리 집은 91년 아버지가 지병으로 퇴직을 하면서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했다. 봄에 장만하여 사계절 내내 먹을 수 있는 묵나물을 만든 것처럼 아버지는 식구들의 제2의 터전으로 성남에 작은 집을 미리 장만하셨기 때문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몇 달이 되지 않은 봄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우리 가족은 그 누구의 고향도 아닌 낯선 성남에서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가족의 곁을 일찍 떠나셨지만, 아버지의 묵은 고사리는 그 후로 오래도록 가족을 지켜주었다. 


 한편 값싼 중국산 중석 수입으로 인해 채산성이 떨어지자 92년 광업소는 폐광이 되었다. 폐광되면서 함께 살던 이웃들도 저마다 살 터를 찾아 전국 각지로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재작년 고향에서 바로 옆집에 살았던 이웃이 의정부에 사신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를 모시고 다녀왔다. 이미 노인이 되신 두 분이 전날부터 준비해 두신 음식은 고사리가 듬뿍 들어간 닭개장이었다. 

“고사리만 보면 너희 아빠가 생각나더라. 요즘 상동에 가면 고사리가 지천이라 너희 아빠가 아주 좋아할 텐데….”

이웃집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닭개장 끓여서 나눠 먹을 때가 좋았는데. 상동 살 때가 힘들긴 해도 재미있었죠?”

“동네 사람들이랑 다 같이 한 그릇씩 먹고 나면 기운이 났어.”     


고사리는 전국 각지에 자생하는 산나물로 양지, 음지, 습지 등 환경조건이 나쁜 곳에서도 잘 자란다. 나에게 고사리나물은 음식이기 이전에 아버지의 생 자체였다. 말린 고사리를 물에 불려 삶으면 다시 탱탱하게 되살아나는 것처럼 외롭고 열악한 삶의 터전에서 노동의 고통을 기꺼이 이겨내신 아버지의 생은 내 생 길목마다 또렷이 되살아난다. 


고사리의 향과 식감 끝에 꾸역꾸역 아버지의 생이 입안을 맴돈다. 아주 오래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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