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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북 Aug 06. 2024

이 시국에 대학병원에서 43시간 유도분만하다

- 기쁜 일로 만났어야 했는데 이렇게 만나서 마음이 조금 그렇네요. 그렇지만 우리 아기 잘 키워서 건강하게 출산해 봅시다.


산부인과 오교수님을 처음 만난 건 1월 초였다. 처음 암진단을 내렸던 이비인후과 교수님이 고위험 산모에 대한 경험이 많은 오교수님을 지정하여 연결해 준 덕분에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나의 케이스는 치료와 출산이 동시에 묶여있기 때문에 혈액종양내과와 산부인과가 같이 협진하여 치료의 방향을 잡아갔고, 혈액종양내과에 매주 진료를 보며 암이 전이되었는지 확인하면서 동시에 산부인과도 2주에 한 번 들려 아기가 건강한지 산모의 상태는 어떤지 계속 확인해 나갔다.


방사선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매일 병원에 출근하다시피 했고, 그러면서 동시에 혈액종양내과 진료도 보고 산부인과 진료도 봐야 했지만 산부인과 진료를 보는 날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유일하게 그곳에서는 환자보다 산모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었다. 만삭 산모들 사이에 앉아 초음파를 기다리고 있으면 나도 다른 예비 엄마 아빠와 다를 바가 없었다. 초음파를 보며 안 보이는 이목구비로 아기의 얼굴을 상상하고 아기의 몸무게와 다리길이를 열심히 받아 적는 그 순간엔 내가 암환자로 병원에 왔다는 생각을 잠시 까먹게 했다.




- 28주만 넘기면 그때부터 아기는 언제라도 출산할 수 있으니 그때까지만 잘 견뎌보죠. 그렇지만 산모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전이라도 언제든지 바로 치료하는 겁니다.


오교수님은 우리를 만날 때마다 꼭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무조건 치료 먼저 하는 겁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교수님이 만났던 고위험 산모들의 마음은 다 똑같아서였을까. 아기에게 혹여나 피해가 갈까 봐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수많은 엄마들을 달래온 시간들이 있어서인지 교수님은 내가 걱정을 꺼내놓기도 전에 늘 먼저 안심시켜 주셨다. 아기는 괜찮아요, 엄마가 괜찮아야죠.


그 말에 기대 우리는 한 주, 한 주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21주, 22주, 23주.

최소 28주까지는 가야 아기 먼저 출산하고 본격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었는데, 그러기 위해선 28주까지 어떠한 전이 증상도 나타나지 않는 게 중요했다. 나는 매일 샤워하며 목에 있는 멍울이 겨드랑이나 쇄골, 사타구니에 번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회사 다녔을 땐 그냥 눈 감았다 뜨면 12주, 어쩌다 보면 16주였는데 이렇게 시간이 더디게 흐를 수가 있나. 화요일 아침마다 아기의 주수가 바뀌었다고 오는 알림이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남편과 나는 그때마다 서로에게 말했다. '23주가 된 것을 축하해.' 매일 살얼음판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으며 28주라는 목표지점까지 뒤꿈치를 들고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드디어 대망의 28주.




- 저 34주까지만 더 끌어봐도 될까요?


28주가 되고 교수님께 가장 먼저 입에서 나온 말은 34주까지 더 가보겠다는 말이었다. 막상 28주가 되자 이대로 출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든 것이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이때 출산한 아기는 너무 작았다. 남편은 종종 '28주에 출산한 아기들도 이렇게 건강하게 컸대' 하고 찾아온 영상을 보여주었으나 나는 그 영상들을 다 보지도 못했다. 나 때문에 멀쩡한 아기를 준비도 되지 않은 채로 세상에 나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어보려고 방사선도 받았는 걸. 덕분에  목에 있는 멍울은 눈에 띄게 없어졌고 그러니까 6주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럽시다. 대신 34주 그 이후는 없어요. 32주 혹은 최대 34주. 34주엔 무조건 출산하는 겁니다.


교수님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웃으며 알겠다고 하셨지만 34주엔 무조건 출산해야 한다는 문장엔 힘을 주어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나도 그 이상으로는 욕심내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28주로부터 34주까지 조심스러운 기다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사이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었다. 1월 1일 대학병원 꼭대기층에 입원하여 내려다보았던 밤은 참 깜깜하고 조용했는데 어느덧 주변은 벚꽃과 개나리의 색깔로 화사하게 물들었다. 나는 출산가방을 챙기며 새해 첫날 입원하러 갔던 그 기분을 떠올렸다. 그땐 정말 막막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왔어. 우리 인생도 계절과 같아서 마냥 겨울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마냥 봄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마냥 세상 끝날 것처럼 좌절할 일도 마냥 행복에 겨워 앞뒤 분간 못할 일도 더는 없다.


약속한 34주가 되자마자 나는 유도분만을 위해 다시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34주에 출산할 경우 유도분만의 성공 확률은 첫날 3,40%, 둘째 날 6,70% 정도 된다고 하셨지만 우리는 무조건 유도분만을 성공해야 했다. 제왕절개로 출산할 경우 항암이 최소 한 달은 더 미뤄지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정말 출산하는 것이 무서워 내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했던 만큼 출산에 대한 공포가 엄청났는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까 내가 무섭고 아프고를 떠나서 나 때문에 세상에 빨리 나오는 아기, 부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군데도 다치지 않고 아픈 곳만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마음의 준비되셨어요?


입원한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오교수님이 병실에 방문하셨다. 전날부터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의 푸근한 미소를 보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교수님은 아기를 위해 이틀간 폐성숙 주사를 맞고 그다음 날부터 유도분만에 들어갈 거라고 하셨다.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아도 우리 한 번 최선을 다해보자고 하시곤 다시 바쁘게 내려가셨다. 교수님은 대체 언제 퇴근하고 언제 출근하시는 걸까. 전공의 파업으로 그때 당시 산부인과에 전공의가 하나도 없어 초음파도 교수님이 직접 보시던 터였다. 뉴스를 틀었다 하면 정부와 의료기관 간의 씨름으로 도배되던 시국에 이렇게 일정대로 무사히 출산을 진행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렇게 텅텅 비어있는 산부인과 5인 병실에서 나는 본격적으로 아기를 만날 준비를 했다. 정말 고지가 눈앞이었다.




그리고 유도분만 당일.

떨리는 마음으로 배에 손을 올리고 분만실로 향했다. 아침 6시경에 분만실에 들어가서 오후 5시까지 촉진제를 투여하고 자궁문이 열리고 출산 준비가 되면 출산을 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분만실 침대에 누워 태동을 측정하며 옆으로 누워있었고 시간이 되자 본격적인 촉진제 투여가 시작되었다. 9시, 12시, 2시, 4시. 5시. 촉진제 용량이 점점 올라가자 허리가 뻐근하고 배가 뭉쳐왔다. 오후가 되면서는 허리랑 다리가 너무 아파 다리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꽤 힘들었는데도 아직 본격적인 진통이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몇 번의 내진과 몇 번의 태동검사가 지나갔지만 아무 차도가 없어 결국 촉진제 투여를 멈췄다.


- 오늘 실패했다고 실망스러워서 울고 있는 거 아니죠? 원래 첫날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만큼 또 내일은 더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높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가서 저녁식사 맛있게 드시고 우리는 내일 봅시다.


촉진제를 멈추고 분만실에 들어왔던 몸 그대로 다시 병실로 돌아가야 하는 나에게 교수님이 교수님 다운 위로를 건넸다. 나는 아니라며 웃어 보이고 난 후 병실에 돌아가자마자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첫째 날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잖아. 오늘은 예행연습이지만 내일은 실전이라고 여기고 씩씩하게 밥을 먹고 다시 질정제를 투여했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 아침 6시. 어제와 똑같은 순서로 관장까지 마치고 분만장에 걸어 들어갔다. 벌써 두 번째 분만장에 걸어 들어가지만 오늘은 꼭 아기와 같이 나올 거란 생각에 어제보다 더욱 떨렸다. 어제는 촉진제를 낮은 용량에서 시작했다면 오늘은 처음부터 바로 높은 용량으로 투여했다. 그 말인즉슨 통증의 강도가 아침부터 세게 느껴졌다는 것. 어제보다 훨씬 아픈 고통에 몸을 베베꼬고 허리를 뒤틀면서도 이렇게 견디기만 하면 아기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무작정 버텼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어제 보다 훨씬 더디게 흘러갔고 절망적 이게도 오후 5시가 되어도 자궁문은 어제와 똑같이 1cm밖에 안 열렸다고 했다.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아예 고통이 없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겠는데 꼬박 이틀을 촉진제를 맞아가며 진통을 느꼈는데 또 멀쩡하게 아기를 품은 상태로 분만장을 걸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멘탈이 무너졌다. 힘들고 허무했다. 어제는 교수님이 내일 성공할 거라며 위로해 주셨지만 오늘은 위로를 건넬 교수님도 없었고 건넬 위로의 말도 없었다. 주치의 선생님이 일단 오늘도 하루종일 금식했으니 가서 식사 먼저 하시고 오후에 다시 질정제를 넣어보자고 했다. 똑같은 과정을 이렇게 세 번째 해야 한다니.


저녁식사 배급 시간이 끝난 시간이라 남편이 지하 식당가에서 저녁을 사 온다고 내려갔고, 나는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침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이틀이나 생으로 진통을 겪었는데 내일 또 똑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니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서 겨우 국에 밥을 말아 저녁을 먹고 또다시 질정제를 투여하기 위해 분만실에 걸어 들어갔다.


주치의 선생님이 위로가 담긴 웃음을 지어 보이며 '교수님이 그래도 내일까지는 꼭 시도해 보자고 하세요. 제가 질정제 투여 정말 최선을 다해서 해볼 테니까 내일은 꼭 자연분만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고 힘을 실어주셨다. 이미 너무 지쳐서 힘이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겨우 힘을 내서 '네, 감사해요!' 대답하고 또 한 시간 태동 검사를 위해 분만장에 누웠다.


내일은 정말 아기를 만날 수 있으려나. 첫날은 뭔지 모르게 하루가 지나갔고, 둘째 날은 그래도 오늘은 성공할 거라는 마음으로 임했는데 내일은 어떤 고통인지 알고 또다시 분만장에 들어와야 한다니. 이제 난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거의 포기하는 마음으로 누워서 한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말 못 한 고통이 몰려오면서 다리가 부르르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이게 뭐지?


나는 분만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편에게 겨우 카톡을 보냈다. [나 온몸이 덜덜 떨리고 너무 아픈데.]


그러자 얼마 뒤에 주치의 선생님이 뛰어들어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주치의 선생님은 해야 할 일을 마치고 퇴근하려는 길이었는데 분만장 밖에서 남편을 만났고 남편이 내가 아파한다고 말씀드리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주치의 선생님은 덜덜 떨고 있는 나에게 조금은 상기되어 기뻐하며(?) 외쳤다.


- 산모님 아파요? 진짜 아파요!?




거의 포기하며 끝났던 유도분만의 둘째 날 저녁에 갑자기 진진통이 걸린 것이다. 곧바로 남편이 들어오고 의료진이 들어오며 촉진제 투여가 다시 시작되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에는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 몇 초 단위로 계속되었다. 온몸을 어찌할 수도 없게 아파서 자꾸만 앓는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 아직 2cm밖에 안 열렸네요.


몇 시간이 흘렀을까. 말도 못 한 고통이 2-30초 간격으로 계속되고 있는데 아직도 자궁문이 열리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이틀간의 진통으로 이미 힘이란 힘은 다 빠진 상태였다. 촉진제를 더 투여하겠다는 당직 교수님께 거의 울면서 빌었다. 제발 촉진제 좀 꺼주세요. 무통주사를 맞아도 나아지지 않고 아무리 고통을 견뎌도 자궁문이 열리지 않으니 더는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치료를 위해서는 자연분만을 해야 하는데, 그걸 위해서 지금 아기도 나도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데도 더는 견디기가 어려워 제발 여기서 멈춰달라고 남편을 붙잡고 애원하고 곁에 있는 의료진 아무 나를 붙잡고도 빌었다.




- 산모님. 오교수님이 지금 병원으로 오고 계시대요. 조금만 더 견뎌봅시다.


밤 10시가 지났을까. 계속되는 나의 애원에 제왕절개 수술을 진행하려고 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오교수님이 직접 오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오교수님이 산모님을 많이 특별하게 생각하시나 봐요. 최대한 자연분만해야 산모님 치료 시작하실 수 있다고. 그러니 조금만 더 힘내요' 당직 교수님이 달래듯 말씀하셨고 나는 오교수님 도착할 때까지만 버텨보겠다고 마음먹었다.



- 아이고. 많이 힘들어요?


교수님이 가운을 입으며 들어오셨다. 나는 교수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져나왔다. 교수님은 그런 나를 다독이며 우리 최대한 버텨보고 그래도 새벽 1시까지 자궁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땐 제왕절개를 하자고 하셨다. 그전까지는 조금만, 조금만 더 견뎌보자고. 그러고는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잘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면 아직도 진통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면 내진을 하고 있었고, 또 정신을 차려보니 두 명의 교수님 사이에서 힘주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 다 왔어요. 이제 수술방으로 갑시다.   




그렇게 우리 나다는 1시 8분에 태어났다. 1시까지 자궁문이 안 열리면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기적처럼 1시에 자궁문이 다 열려서 자연분만 할 수 있게 되었고, 산부인과에 전공의가 한 명도 남아있지 않는 이 시국에 당직이 아닌데도 한밤중에 달려와주신 교수님 덕분에 두 분의 교수님 사이에서 건강하게 아기를 출산할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나 좌절할만한 상황이 오면 태어난 아기를 보며 이때를 꼭 떠올리리라 마음먹었다. 안될 것 같아도 결국엔 어떻게든 돕는 손길을 붙여주시고 때가 되었을 때 가장 안전하고 건강한 방법으로 나다를 태어나게 해 주신 이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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