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람북 Aug 13. 2024

항암을 코 앞에 두고 산후우울증을 마주하다

여고생들은 서로에게 '나중에'로 시작되는 질문을 많이 한다. 너는 나중에 결혼하고 싶어? / 너는 나중에 결혼 몇 살에 하고 싶어? / 너는 나중에 아기 낳고 싶어?


이 중에서 본인의 의지만 가지고는 할 수 있는 게 한 개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그때는 나름 사춘기에 형성된 신념을 가지고 열심히 대답하곤 했는데 나의 대답은 대부분 '아니'였다.


- 왜?

- 그냥. 아기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

- 엥? 네가 행복하게 해 주면 되잖아!

- 우리 부모님도 나를 품고 있을 땐 날 위해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지금 나를 봐. 전혀 그렇지 않잖아)라고 생략된 말은 친구 누구에게도 못 했지만 그때의 마음은 성인이 되고도 꽤 오래 유효했다.




그랬던 내가 나의 아기를 만나러 간다.


2박 3일의 유도분만 끝에 새벽 1시에 기적처럼 자연분만 할 수 있었지만 출산 당시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직후에 수혈을 받아야 했고 동틀 무렵에야 병동으로 돌아와서 피투성이가 된 환자복을 갈아입을 겨를도 없었다. 예상보다 길어진 입원기간 때문에 남편은 짐을 챙기러 떠났고 그 사이 NICU 면회 시간이 되어 나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에 양손에 주사 바늘이 꽂힌 채로 더듬더듬 걸어갔다. 병동 문 열리면 코앞에 있는 거리를 가는데 엉거주춤 걷느라 10분이나 걸렸다. 면회시간 땡 하자마자 다른 사람들은 이미 들어갔는지 NICU 앞에 아무도 없었다. 문 앞을 지키고 계시는 간호사 분이 장갑이랑 비닐 가운을 착용하라고 주셨는데 새벽에 갓 출산하고 양 손등에 주삿바늘이 꽂힌 채 피범벅 환자복차림인 나를 보고는 '어머어머' 하며 서둘러 비닐 가운을 몸에 둘러 묶어주셨다.


- 산모님, 이제 오셨네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NICU에 들어서자 몇몇 간호사 분들이 나를 부축해 주었다. 이미 스토리를 알고 계신 듯했다. 나를 보자마자 아기는 저기에 있다고 안내해 주셨고, 나는 몇 걸음 걷다 NICU 중앙에 있는 아기의 형체를 보고 그 자리에서 그만 울음이 터져버렸다.




부모는 아기를 낳을지 말지 최소한 계획이라도 할 수 있지만 아기는 아무 결정권 없이 그 부모에게 태어나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게 아기 입장에선 부당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 했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났으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최대한 노력해 줘야지. 적어도 고등학생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반항 같은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내가 결혼할 나이가 되고 아기를 낳을 나이가 되자 언제 그런 생각을 했냐는 듯이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아마도 남편에게서 받는 넘치는 사랑이 가족에 대한 새로운 꿈을 꾸게 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에게서 태어나는 아기는 행복할 거라는 확신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 때문에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먼저 태어나야 했던 우리 아기가 자가호흡을 돕는 기계에 의존하여 아주 작은 모습으로 내 눈앞에 있는 것을 보게 되자 불현듯 고등학생 때 했던 생각들이 기억나면서 삽시간에 두려워졌다. 과연 이 아기를 행복하게 살게 해 줄 수 있을까? 벌써 나 때문에 이렇게 힘든데? 마음 같아선 병원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 산모님. 우리 아기는 34주에 태어났지만 아주 건강해요. 자가 호흡도 가능해서 내일부턴 이 기계들 모두 제거할 거예요. 정말 고생하셨어요.


나는 간호사 선생님들의 말에 의지해 한걸음 한걸음 아기에게 다가갔고 눈물로 자꾸만 뿌예지는 앞을 닦으며 아기의 이름을 겨우 불렀다. '나다야' 하고. 마음 같아서는 고맙다 라던지, 만나서 반가워라 던 지, 사랑해 라던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떤 말을 하는 것도 아기에게 미안해서 이름밖에 부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짐했다. 최선을 다할게. 최선을 다해서 네가 엄마 아빠에게서 태어나서 참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정말로 좋은 부모가 될게.





그렇게 나는 작은 숨을 힘차게 들이쉬고 내쉬는 나다를 병원에 두고 먼저 집으로 왔다.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다는 NICU에서 더 지켜보며 안정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 확인되고 뇌 MRI 등 기타 검사를 마치고 나면 집으로 올 수 있다고 했다. '오늘 나가면 이제 셋이 되어서 들어오겠네!' 하면서 출산가방을 들고나갔는데 그 말이 무색하게 다시 둘이 집에 들어오게 되니 이미 그렇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도 머쓱했다.


산후조리원은 딱히 가지 않았다. 예정일보다 한 달 넘게 아기를 빨리 출산했을뿐더러 출산 후에 항암치료 스케줄이 어떻게 잡힐지 알 수 없었다. 혈액종양내과 교수님께 출산하고 초유정도는 먹일 수 있게 시간을 달라고 해서 딱 그 정도의 시간은 허락해 주셨지만 산후조리를 할 만큼의 여유 시간은 우리에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기 없이 혼자 산후조리하러 들어가긴 싫었다. 다른 산모들은 다 아기를 보러 가는데 나만 덩그러니 병원에 있는 아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힘들게 뻔했다.


- 내가 산후조리원 보다 더 잘해줄게! 더 편하게 쉬게 해 주고, 더 영양가 있는 음식 해 줄 수 있어!


남편은 본인이 산후조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출산 전에는 집에서 산후조리 하는 다른 사람들의 브이로그도 수차례 봤고, 퇴원 전에는 먼저 집에 와 침구를 모두 세탁해 놓고 집을 따뜻하게 해 두었다. 산모에게 좋다는 미역국도 한 대접 끓여놓고 시금치도 무쳐놓았다. 나는 남편이 씻어준 딸기를 먹으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기도 건강하고 나도 무사히 자연분만으로 출산했어. 남편도 이렇게 사랑으로 보살펴주고 있고 앞으로 검사 잘 받고 항암치료만 받으면 돼.





그런데 참 이상하다. 분명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구멍 난 바닥으로 물이 새는 것처럼 자꾸만 알 수 없는 감정이 새어 들어왔다. 아기에게 초유를 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했는데 모유를 유축하면서도 자꾸 눈물이 나고, 남편이 모유를 전달하러 병원을 매일 왔다 갔다 하는 바쁜 와중에도 나를 챙겨주는데 자꾸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도 없었다. 뭉뚱그려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 같은 것이 계속해서 밀고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산후우울증이었다. 분명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니 아기만 건강하게 태어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기가 태어나고 나니까 남은 나는 껍데기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한 몸으로 곧바로 PET-CT를 찍고 항암에 들어가야 하는데, 나의 두려움은 지금부터 시작인데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고 아기에게만 집중하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 산후우울증이라니. 진짜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나는 우울해하면서도 이 모든 감정이 사치라는 것을 알았지만 팔다리가 따로 노는 고장 난 인형처럼 나는 머리로는 감사해하면서도 몸과 마음은 힘들다고 허덕이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바람에 나부끼는 딱지와도 같아서 어제는 감사하다고 기쁨으로 고백해도 오늘은 나 죽겠다고 우는 것이 우리의 본모습이다.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180도로 바뀔 수 있는지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잘도 뒤집힌다. 나는 나다 앞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부모가 될 것을 눈물로 다짐해 놓고 집에 와서는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나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우는소리를 하는 내가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산후조리원 못 간 것도 서럽고 맨날 똑같은 미역국 데워먹는 것도 서러웠다. 지금까지 이 모든 산을 함께 넘어준 남편에게 엉엉 울며 반찬투정을 하는 꼴이라니. 영문도 모른 채 계속 눈물을 쏟아내는 나에게 남편은 '왜 그러는데. 도대체 그럼 미역국 말고 뭐 먹고 싶은데.' 했고 나는 울면서 '감자조림.'이라고 대답했다. 생전 감자조림 먹지도 않으면서.


그날 저녁 남편은 기가 차면서도 열심히 감자조림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 감자조림을 먹고 나서 아기가 울음을 그치듯 산후우울증을 그쳤다. 어쩌면 나에게 필요했던 건 딱 그 정도의 스탑 사인이었던 것 같다. 더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게 멈춰주는 스탑 사인.


그렇게 산후우울증은 일주일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작은 소동처럼 지나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보다 더 길게 우울해할 시간이 없었다. 내 몸에서 아기를 안전하게 세상으로 내보냈으니 이제는 남아있는 암과 본격적으로 싸울 차례였다. 하루라도 빨리 몸조리를 해야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어. 나는 마음을 챙겨 서둘러 다음날로 또 다음날로 달려갔다.

이전 07화 이 시국에 대학병원에서 43시간 유도분만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