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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북 Aug 27. 2024

암 판정 5개월 만에 항암을 시작하다

출산을 하고 나니 혈액종양내과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다에게 초유를 주기 위해 기다려주기로 한 일주일이 지나자마자 PET 검사와 흉부, 복부/골반, 목 CT 검사가 잡혔고 비로소 조영제를 투여했다. 암 판정은 5개월 전에 받았지만 이제야 제대로 검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정말 나다만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으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나다가 나에게서 빠져나가고 정말 나 혼자가 된 몸을 검사대에 눕히고 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무서워졌다. 2주 만에도 전이가 여러 군데 일어나서 빠르게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는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을 5개월이나 항암 없이 그대로 뒀으니.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이미 쇄골이며 겨드랑이며 사타구니까지 번져있대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기대하지 않는 건 잘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실망하는 것에 질려버린 나머지 다시는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해 내가 바라는 것을 위해 열심히 행동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정 반대되는 상상을 했다. 초등학생의 나는 '엄마, 우리 다시 모여 행복하게 살아요'라고 편지를 쓰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고 마음을 먹었고, 중학생의 나는 백일장에 나가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상은 굳이 안 받아도 돼'라고 생각했고, 고등학생의 나는 문예창작과에 가고 싶어 했으면서 '나는 다 떨어질 거야'라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는 편이 나에게 이로웠다. 최선을 다하고 마음껏 꿈꿔도 될까 말까 한 소망들은 대체로 나의 마음속의 주문들로 인해 상상 속에서부터 이미 좌절되어 마땅히 그럴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상상하기가 좀 곤란해졌다. '이미 암이 곳곳에 다 퍼졌을 거야, 항암 없이 5개월을 그냥 버틴 게 말도 안 되지, 어쩌면 뼈에도 전이가 되었을 수도 있어' 이렇게 상상해보려고 하면 울컥 눈물부터 나왔다. 내 인생이 나만 책임지면 될 때엔 마음껏 좌절하고 바닥으로 떨어져도 상관없었는데, 나만 믿고 세상에 태어난 아기와 그런 나와 아기를 살리려고 잡히는 대로 최선을 다한 남편의 얼굴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화들짝 놀라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는 괜찮을 거야. 아무 문제없을 거야. 아무 문제없어야 해.'


그러니 이제까지 내가 얼마나 나를 엉망진창으로 대하며 살아왔다는 건가. 내가 암에 걸리고 나서 누구는 '네 아빠 때문이야'라고 했고 누구는 '혼자 살면서 너무 배달음식만 시켜 먹고 건강하게 몸을 챙기지 않아서'라고 했고 누구는 '20대 때부터 너무 방송국이며 지금의 직장이며 뼈를 갈아 넣어서 그렇다'라고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내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막 대했기 때문이었다.





PET/CT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것처럼 이제까지의 나는 저 멀리 던져버리고 다시 새롭게 살게 될 거야. 어떤 결과가 나와도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치료 잘 받으면 되는 거야. 잘 치료받고 나서는 누구보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귀하게 대하며 그런 생각과 마음으로 가득 채울 거야. 더 깨끗하고 아름답고 튼튼해지기 위한 과정이야.


남편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혈액종양내과 진료실 앞에 나란히 앉았다. 그곳에 앉아 초조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자니, 처음 암 판정을 받았던 12월이 떠올랐다. 그때는 당연히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들어갔다가 날벼락을 맞고 나왔는데, 지금은 예상되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으니 더욱 심장이 떨렸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남편이 손을 잡아주며 얘기해도 내 손은 자꾸 차갑게 식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나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 아기는 어때요? 잘 크고 있어요?

- 네... 지금 퇴원해서 집에 있어요.

- 벌써 집에 갔어요? 다행이네. 건강하게 잘 있는 거죠?

- 네...


교수님이 아기에 대해 물을수록 마음이 착잡했다. 처음 이비인후과 교수님께서 어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지금 임신 몇 주차라고 하셨죠?' 하고 되물었던 때가 생각나며, 교수님이 물어보는 아기의 근황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마음속으로 최악의 경우를 들을 준비를 갖췄다.




- PET/CT랑 찍어본 결과 깨끗하고요. 원래 목에 있었던 암덩어리는 방사선으로 쪼그라든 것 같네요. 보이는 게 없어요.


그런데 교수님의 입에서 '깨끗하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렇다 할 새도 없이 숨을 깊게 들이쉬며 입을 가렸다. 눈물이 순식간에 차올라 순식간에 앞에 교수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긴장하고 있던 남편도 뒤에서 '와...' 하며 안도의 한숨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나중에 들었던 이야기지만 함께 진료실에 있었던 간호사도 정말 기적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이가 빠르고 공격적인 암이라 사실 임신하며 버티는 그 기간에 전이는 무조건 일어났을 거라 생각했다고. 호르몬 때문에 가슴 쪽에도 전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클 거라 예상했다고. 그런데 검사 결과를 받아보고 교수님도 의료진도 모두 기뻐했다고 하셨다.



- 그래도 항암은 해야 해요. 혈액 속에 눈에 보이진 않아도 미세 잔존 암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항암은 예방적 목적으로 3회 진행하겠습니다.


마치 암에서 해방된 것처럼 기뻐하는 우리를 향해 교수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항암을 해야 한다고 하셨지만, 그마저도 기뻤다. 이 세상에서 항암을 한다는데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진료실을 나와서 암센터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 톤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나 항암 3차 한 대! 3차만 하면 된대!'








그렇게 나의 항암은 출산한 지 보름 만에 시작되었다.

세상에 산후조리를 항암으로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분만실의 무서움을 다 잊기도 전에 나는 다시 수술대 위에 누웠다. 항암을 하기 위해 오른쪽 쇄골 아래에 케모포트를 심기 위해서였다.


블로그 글을 보면 케모포트를 심는 시술이 간단하다고 하지만 매우 아프고 힘들었다는 내용이 많았다. 시술하러 걸어 들어가지만 나올 때는 누워 나온다고,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는 내용이 다수였다. 케모포트는 항암을 정맥주사로 투여하지 않고 심장 가장 가까운 곳 혈관에 직접 투여할 수 있게 하는 의료장치로 항암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술을 받았지만 꼭 필수는 아닌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은 케모포트를 심어 놓은 곳이 덧나고 고생하는 게 싫어서, 또 가슴에 영원히 암 환자라는 흉터를 남기는 게 싫어서 케모포트를 하지 않고 정맥 주사로 한다고 했다. 나는 흉터보다도 시술을 하는 과정이 무섭고 또 하고 난 이후의 불편함이 싫어서 교수님께 항암 3차만 하면 되는데 케모포트를 안 하고 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


- R-CHOP 항암제는 매우 독하기 때문에 정맥 주사로 놓을 경우 잘못하면 혈관이 다 녹거나 주변 장기가 괴사 할 수 있어요. 항암 3차를 하더라도 케모포트 시술은 하셔야 합니다.


그럼 혹시 전신마취를 하고 받아도 되냐고 물었더니 그 또한 안된다고 하셨다. 심장 부근에 심기 때문에 불편함이나 이상이 있을 경우 즉시 반응해야 해서 국소마취만 하고 진행한다고. 결국 나는 천으로 얼굴만 가린 채 케모포트 시술을 받았다.




케모포트 시술은 꽤 짧은 시간에 끝났지만 느낌은 매우 이상했다. 마취 주사가 가장 아플 거라고 하셨는데 정말 마취가 들어간 이후로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피부 생생히 느껴지는 무언가 심는 느낌과 잡아 흔드는 느낌, 피가 흐르는 느낌은 국소 마취로 가려지지 않아 눈을 질끈 감고 견뎌야 했다. 그렇게 케모포트 시술이 끝나고 지혈이 끝나자 나는 침대채로 어딘가 이동하게 되었다.



그곳은 바로 항암낮병동.

아니 케모포트 심자마자 이렇게 바로 항암 시작한다고? 한숨 돌리고 마음먹을 새도 없이 나에게 투여될 각종 항암제가 준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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