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국 고민 끝에 방사선을 받기로 결심했다. 결정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비건 빵이었다. 그간 나름 철저하게 식단을 지키며 목에 있는 암덩어리가 커지지 않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빡빡한 식단에 지친 어느 날 비건 카페에 갔다가 그만 멍울 사이즈가 눈에 띄게 커져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했던 식단으로 정말 암덩어리의 커지지 않게 할 수 있었는지, 비건 빵 그거 조금 먹었다고 순식간에 크기가 커질 수 있는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어쩌면 지금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명확한 명분이 필요했는지도.
- 그럼 CT는 조영제 없이 촬영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대신 방사선 치료 계획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머리 쪽 MRI가 필요한데요. 현재 저희 쪽에서는 MRI 촬영을 하시기엔 기약이 없으니까 외부에서 촬영한 후 다음 주까지 저에게 전달해 주시는 걸로 하시죠.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방사선을 시작할 무렵 대학병원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와 함께 전공의 파업 사태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병원 내에서도 점점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에 대한 안내가 늘어감과 동시에 내부에 있는 TV는 뉴스를 틀어주는 것 대신 의료 관련 영상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살면서 의료정책이 이렇게 피부에 맞닿아본 적이 있던가. 당장 전공의가 없어 치료를 위한 MRI를 찍지도 못한다니. 병원에서 갈만한 영상의학과를 몇 군데 뽑아주었지만 막상 가보면 임산부를 촬영할 수 있는 MRI 장비는 없다며 대학병원에서 찍어야 한다는 대답만 들었다. 대학병원에서 찍을 사람이 없어서 여기로 보냈는데 여기는 장비가 없어서 대학병원으로 가라니요.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르는 배를 부여잡고 길거리에서 여기저기 병원에 전화하며 떠도는 시간 동안 뻐근한 허리보다도 자꾸만 화가 치밀어 힘들었다. 대체 우리 보고 뭐 어떻게 하라는 거야. 다만 이 분노의 대상이 갑작스럽게 의대 증원을 하겠다는 정부인지, 무턱대고 자리를 비운 전공의인지, 여기저기 뺑뺑이 돌리는 병원들인지 누구 하나로 명확하게 짚을 수 없어 그저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다시 대학병원에 전달했고 교수님이 나서서 병원을 알아봐 주신 후에야 MRI를 일정에 차질 없이 제출할 수 있었다.
방사선 치료는 총 20회 진행한다고 했다. 본격적인 치료에 앞서 목 부위에 정확하게 방사선을 조사하기 위한 마스크를 제작하고, 태아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차폐 구조물을 배 위에 올려보는 작업을 진행했다. 얼굴을 움직이지 못하게 석고 같은 것으로 밀착한 마스크를 쓰고 배 위에는 납덩이같은 것을 아크릴 대 위에 올리고 있으니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20회를 해야 한다니.
- 치료받기로 한 거지요?
방사선종양외과 교수님이 직접 오셔서 마스크 쓰고 꼼짝없이 누워있는 나에게 조금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 여기 누워있는 거 보면 모르시겠냐고요. 그렇게 방사선 안 받고 싶다고 온갖 의심의 눈초리와 못 미덥다는 뉘앙스로 이것저것 질문하곤 했었는데 결국엔 이런 모습으로 누워 있으니 그럴 일도 아닌데 괜히 멋쩍어 웃었다.
- 잘하셨어요. 이렇게 차폐하면 문제없을 테니 우리 한 번 치료 잘 받아봅시다.
순간 마스크 안으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아니었을까. 아기에게 좋은 것만 줘도 모자란 엄마 마음에 이렇게 누워 방사선을 직접 받아야 하는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삼켜지지 않았는데 교수님의 힘 있는 그 한마디가 치료 잘 받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했다. 그래서 나는 움직여이지 않는 입과 눈으로 연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전했다.
실제로 방사선 치료는 MRI만큼 무섭거나 힘들지 않았다. 이제 제법 배가 많이 나와서 똑바로 눕는 것이 힘들다면 힘든 점이었는데 그래도 누워있는 시간이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견딜만했다. 오히려 임산부를 맡게 된 방사선사 분들이 더 힘들어 보였다. 성인 남성 두 명이서 맞들어야 들어 올릴 수 있는 차폐 구조물을 다섯 개 이상을 쌓아 올리고 내리는 과정이 번거로우셨을 텐데 그걸 매일 반복하게 하는 것 같아 괜히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머쓱하고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나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자세로 누워 방사선을 받으면서 짧은 시간 배 속에 있는 아기와 의료진들을 위해 기도했다. '방사선이 우리 아기에게 나쁜 영향이 가지 않게 해 주세요. 지금 의료대란 속에서도 이렇게 치료받게 해 주심에 감사해요. 현장에서 자리를 지키는 의료진들의 건강과 마음을 지켜주세요.' 기도는 매일 똑같았지만 기도에 담긴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져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사한 마음이 커지는 것처럼 후유증도 커져갔다. 나는 오른쪽 귀 밑 아래 목 부근에 있는 멍울을 제거하기 위해 방사선을 조사하였는데 침샘 부근이라 그런지 방사선 회차가 거듭될수록 입이 자꾸만 타들어갈 것처럼 마르고 건조해졌다. 그래서 수시로 물을 마셔야 했는데 문제는 밤이었다. 안 그래도 임신 주수가 늘어날수록 방광이 눌려 자면서도 화장실을 자주 들락날락하던 때였는데 거기에 물까지 계속 마시고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자려고 누우면 건조해서 물을 마시고 물을 마시면 몇 분 뒤엔 화장실을 가야 했다. 밤에 이렇게 물과 화장실과 침대를 반복하다가 무거운 배로 몇 번이고 일어나는 게 힘들어 나중에는 아예 화장실 근처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잠을 자기도 했다.
또 방사선을 받고 나서 입맛이 달라지기도 했는데 매일 갈아먹는 과일 야채 주스도, 단백질을 챙기려 마셨던 두유도 자꾸만 흙맛이 나서 삼키기가 힘들었다. 가뜩이나 매일 건강식, 자연식으로 밥 먹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거기에 입맛까지 달라지니까 매 식사시간마다 마음이 어려웠다. 열심히 건강한 밥상을 차려주는 남편에게 미안해서 대부분은 내색하지 못했지만 너무 힘든 날에는 과일 야채 주스 도저히 못 먹겠다고 투정 부리기도 하고 떡볶이, 라면, 고기를 원 없이 먹는 먹방을 보며 울기도 했다. 암환자이기 이전에 나는 한창 먹고 싶은 게 많은 산모였다.
그래도 먹고 싶은 것을 못 먹는 것은 참으면 되니까 괜찮았다. 방사선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저혈압과의 싸움이었는데 방사선을 받고 난 피로함 때문인지 아니면 몸에 있는 피가 모두 태아에게 가서인지 모르겠지만 저혈압으로 인해 몇 번이나 쓰러졌다. 이게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어느 타이밍에 쓰러질 것 같은지 감을 잡게 돼서 그 뒤론 완전히 넘어지듯 쓰러지는 일을 줄었으나, 방사선 치료를 받고 나올 때 혹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종종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방사선 20회를 꼬박 다 받았다. 배는 점점 불러오고 방사선으로 인한 피로와 저혈압에 무기력해지고 가끔은 얼굴이 샛노래져 쓰러지기도 했지만 일단은 출산 전까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다 했다는 생각에 후련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제부터였다. 눈에 보이는 암 덩어리는 방사선으로 제거했지만 혈액암이기 때문에 사실상 암이 어디로 퍼지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상태로 출산까지 최대한 버티고, 또 항암까지 무사해야 했다. 앞으로 내 앞에 놓인 시간들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정부와 의료진의 대치도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게 치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