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일. 새해 첫날을 대학병원 입원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나는 대학병원 꼭대기 층에 있는 5인 병실로 배정되었다. 살면서 입원은 처음인지라 낯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산부인과 병동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산모가 이곳에 있으니 나만 혼자 병실에 잘못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병실은 건조하고 고요했다. 다들 커튼을 닫고 있어 어떤 분들이 계시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너무 조용한 탓에 보호자와의 대화 소리, 통화하는 소리, 움직이는 소리도 생생히 전달되어 대충 어떤 상황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바로 옆자리 베드를 쓰시는 할머니는 먼 지방에서 항암을 하러 올라오신 것 같았다. 할머니는 항암의 부작용이 두렵고 여러 가지가 걱정되는데 무뚝뚝한 경상도 할아버지는 보호자로 와서는 자리를 비우거나 보호자 침대에서 코를 골며 주무시거나 걱정하는 할머니에게 '이게 그렇게 힘들면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은 다 어떻게 받아? 혼자만 유난 떨지 말고 그냥 해!'하고 타박하기 일쑤였다. 마음 같아서는 커튼을 확 제치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하고 싶었지만 심드렁하게 말하는 할아버지의 투박한 표현에도 할머니는 은근히 위로받으시는 것 같아 나도 가만히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맞아.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 거잖아. 나도 나중에 항암 하게 되면 그냥 마음 단단히 먹고 남들 다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해야지.
그런가 반면 앞자리 베드를 쓰시는 중년의 여성분은 보호자도 없이 혼자였다. 앞자리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헛구역질하는 소리, 화장실로 급히 뛰어가 구토하는 소리, 간호사가 오면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 밥도 잠도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약이든 뭐든 어떻게든 해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만 들렸다. 또 가끔씩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이렇게 사느니 그냥 죽는 게 낫겠다고, 이렇게 힘든데 치료를 뭐 하러 받는지 모르겠다고 울며 말씀하셨지만 상대방의 위로에 금세 '그치? 견뎌야겠지?' 하시는 것을 보면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 무섭다고 걱정하는 할머니도, 그냥 죽는 게 낫다는 중년의 여성분도 사실 빨리 건강해져서 평범하고 소중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를 똑같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침대에 어설프게 걸터앉아 빵빵 발로 차는 아기의 태동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저도요, 저도요 하고 마음을 보탰다.
- 환자분 오늘은 일단 쉬시고 내일부터 자리 나는 대로 MRI 찍어볼게요. 오늘은 저녁식사까지 드시고 이후 생수 포함하여 금식해 주세요.
저녁을 먹고 나의 금식이 시작되었다. 병실은 저녁 먹고 나면 사실상 할 일이 딱히 없기 때문에 8시만 되어도 한밤중인 것처럼 어두워졌다. 나는 보호자침대에서 자려는 남편을 어떻게든 일으켜 집에 가서 푹 자고 내일 아침에 오라고, 어차피 나도 곧 잘건데 굳이 여기서 불편하게 잘 필요 없다고 남편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니 커튼을 친 작은 공간에 비로소 나 혼자가 되었다. 마치 아무리 보호자가 곁에서 도움을 주려고 해도 결국엔 나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러자 순간 너무 무서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집에 도착한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여보. 집에 와서 빨래를 너는데 문득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게 느껴지는 거야. 사랑받는 우리 여보, 나도 사랑해요.]
방금까지만 해도 앞이 깜깜했는데 남편의 메시지를 읽고 나니 마치 캥거루 뱃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나를 보호하기 위한 어둠처럼 느껴졌다. 그래 내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버려질 리 없지. 왜 이런 상황이 나에게 주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사랑과 보호하심 속에 있어. 그렇게 생각하자 그 건조한 병실에서도 잠이 솔솔 왔다. 옆자리 할아버지의 드르렁드르렁 코 고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만큼 평안한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고 본격적인 검사가 시작되었다. 그중 가장 힘든 것은 MRI였는데 그렇게 좁은 통로에 부푼 배를 안고 누워 요란한 소리를 듣는 검사인 줄 몰랐다. 들어가기 전 의료진이 폐쇄공포증이 있냐고 물어봤었는데 없다고 당당하게 대답하던 나였다. 그새 없던 폐쇄공포증이라도 생긴 걸까. 필리핀 아닐라오 섬에서 야간 스쿠버 다이빙도 했었는데. 고작 이 기계 안에 들어가 누워있는 것이 이렇게 커다란 공포를 줄지 몰랐다.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자꾸만 숨이 가빠오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배 속에 아기가 함께 요동해서 더욱 참을 수 없었다. 혹시 안에서 힘들면 누르라고 쥐어준 비상벨을 몇 번이고 눌러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결국 예정시간보다 단축해서 검사를 끝냈는데 '나 때문에 너무 짧게 해서 검사가 잘 안 나왔으면 어떡하지? 가뜩이나 조영제도 없이 진행했는데... 암이 잘 안 보이는 거 아니야?'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한 번 더 검사하고 싶지는 않아 도망치듯이 빠른 발걸음으로 치료실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MRI 검사를 부위 별로 진행하고, 1박 2일이면 끝날 거라 예상했던 입원이 2박 3일로 늘어나고 나서야 검사를 위한 모든 과정이 끝났다. 그 사이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을 만나기도 했는데 교수님은 우선 목에 있는 암을 국소마취해서 절제할 수 있는지 이비인후과와 산부인과에 협진 요청해서 문의해 보신다고 하셨다. 사실 혈액암은 고형암이 아니기 때문에 수술이 아닌 항암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항암 없이 임신 주수를 끌어보고자 하는 교수님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졌다.
- 이비인후과에 문의했더니 국소마취 하고 수술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해요. 최대한 목에 있는 멍울을 없애고 싶었는데... 일단 방법을 더 찾아보죠.
2박 3일이 3박 4일이 되려나 하고 퇴원을 포기할 때 즈음 교수님이 다시 오셨다. 나는 어차피 그렇게 수술을 하는 건 너무 무서울 것 같아 속으로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 그리고 조영제 없이 진행하긴 했지만 우선 지금 결과상으로는 다른 곳에 전이된 부분은 없어 보여요. 나중에 PET-CT 검사를 해봐야 더 정확하게 알겠지만... 그래도 우선은 지금 상황으로 검사할 수 있는 건 다했기 때문에 전이가 없다고 보고 앞으로는 일주일에 1번씩 외래 오시면서 출산할 수 있는 주수까지 추적관찰하는 걸로 하죠. 다음 외래 때 뵐게요.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대학병원에 가서 혈액종양내과와 산부인과 진료를 보게 되었다. 교수님을 만나서 딱히 치료를 받거나 검사를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목에 있는 멍울이 쇄골, 겨드랑이, 사타구니에도 만져지나요?' 물어보시면 '아니요. 아직까진 없어요.'라고 대답하는 게 끝이었다. 마치 전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묻고 답하며 우리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당장이라도 치료에 들어갈 태세로 매주 병원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런 우리에게 교수님은 하나의 선택지를 더 던져주었다.
- 방사선이요...?
- 네. 임산부는 방사선 차폐 구조물을, 그러니까 말하자면 벽 같은 것으로 가리고 해당 부위만 방사선을 조사할 수 있는데요. 그게 가능한지 방사선종양외과 협진 요청해 놓겠습니다. 한 번 상담받아보시죠. 우선 지금 있는 부위의 암세포만 없어도 시간을 더 끌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암이 진행되면 어떤 치료든 받아야겠다고 다짐은 했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가지 않기 위해 암을 진단받은 그 순간부터 밀가루, 고기, 당 같은 좋지 않은 음식은 먹지 않고 집에서 사용하는 기름과 조미료도 싹 다 바꿨고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목의 멍울 크기가 점차 줄어간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최소 34주까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방사선이라니까 거부감부터 들었다. 아니 다른 임산부들은 엑스레이도 안 찍고 공항 검색대도 피해 가는데 나는 아기를 품은 몸에 방사선을 직접 조사해야 한다니. 꼭 해야 하는 걸까? 그날부터 마치 극한의 발란스 게임처럼 항암이냐 방사선이냐를 놓고 하루는 '그냥 버티다가 전이가 되면 그때 항암을 하자' 결심하고, 또 그다음 날에는 다시 '아니야. 그냥 지금 방사선을 받고 안전하게 34주까지 끌어보자.' 하며 갈피를 못 잡은 채 방사선종양외과 교수님을 만나는 날이 되었다.
- 다음 주부터 CT 찍으시고 방사선 시작하시죠.
- 바로 다음 주부터요...?
우리는 상담만 받으러 왔다고, 진짜 방사선을 시작할지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교수님은 임산부도 방사선 받을 수 있으며, 다행히 조사부위가 태아로부터 비교적 멀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크지 않을 거라 말씀하셨다. 나는 그래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 항암 아니면 방사선 둘 중에 하나는 선택하셔야 해요. 미만성 거대 B세로 림프종인데 아무것도 안 하고 3개월을 그냥 기다리는 건 선택지에 없습니다. 저는 방사선종양외과에 있기 때문에 태아에게 상대적으로 방사선이 항암보다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거고요. 선택은 환자분이 하시면 됩니다.
내가 머뭇거리자 교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 암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해서 편하게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최대한 아기에게 피해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식이요법으로 어떻게든 끌어보려고 치료를 외면했던 걸까. 우리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어차피 들어도 모를 방사선 단위에 대해 물어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고도 답을 내리지 못해 일주일만 시간을 더 달라고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며 여기까지 왔다. 이걸 먹을래 저걸 먹을까부터 시작해서 이 대학을 갈까, 어떤 전공을 할까, 어떤 직업을 가질까, 어떤 사람을 만날까. 나는 이따금 유아교육과 전공이 아니라 문예창작과를 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그때 그 친구를 안 만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라디오 작가를 그만두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결과적으로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경험은 오롯이 나만이 지고 가는 무게였기 때문에 때론 되돌리고 싶고 억울해도 여기까지 짊어지고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어떠한가. 나의 선택이 아직 장기도 다 형성되지 않은 아기의 전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민을 하면 할수록 더욱 답을 내리기 힘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버티는 건 선택지에 없다고 했지만 나는 자꾸만 없는 선택지를 들춰보며 왜 이런 상황이 온 건지 누구도 탓할 수가 없어 괜히 뒤만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