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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씩 삼백 번이라도 이렇게 살아있으면 되잖아요

by 다람북 Jan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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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주에 찍었던 CT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이다. 마지막 항암을 마치고 벌써 두 번째 검진이다. 별일 없겠지만 아니 별일 없어야겠지만서도 병원에 가는 날은 전 날 밤부터 그렇게 긴장이 된다. 워낙 암 진단을 느닷없는 어느 날 갑자기 받았기 때문에 이제 병원은 나에게 '그럴 리 없을 거야'가 아니라 '언제든 그럴 수도 있다'라는 마인드가 기초값이 되어버렸다.




3개월 전 첫 검진 땐 혼자 방사선종양학과랑 산부인과까지 같이 들렀다 왔는데 이상하게 병원을 나오면서부터 눈물이 났다. 혈액종양내과, 방사선종양학과, 산부인과 모두 별 이상 없으니 3개월 뒤에 만나자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누가 보면 다시 재발했다는 이야기라도 들은 사람처럼 서럽게 울었다. 집 앞에 차를 주차하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에, 또 집 현관문 앞에서 마음을 잘 추스렸는데도 문에 들어서자마자 나다의 얼굴을 보니 참기 어려울 정도로 울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그 당시엔 잘 몰랐는데 그날 저녁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병원에 하루종일 대기하고 진료 보고 하는 것들이 힘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참 힘들다.'

생각해 보면 이 감정을 처음으로 마음 놓고 느꼈다. 이제까진 뱃속에 나다가 있으니까, 또 옆에 남편이 있으니까 힘들다는 말을 입에도 올리기 어려워서 애써 외면했다. 혹여 아기가 다 들을까 봐. 버티고 있는 남편에게 더 짐을 지게 하는 걸까 봐. 필사적으로 두렵고 힘들고 어려운 마음들은 외면했는데 모든 치료가 끝난 후에 홀몸으로 아기도 남편도 없이 병원에 혼자 하루종일 있으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제는 힘든걸 힘들다고 말할 수 있어서 참 시원했고 한편으론 아직도 힘든 병원 생활이 계속되고 있어서 갑갑했다.





그렇게 눈물 콧물 다 뺐던 첫 번째 검진으로부터 3개월이 지났다. 3개월이 어찌나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항암 이후로 식염수 냄새만 맡으면 울렁거려서 그런가 CT를 찍는 건 여전히 싫고 검사 결과를 듣는 건 여전히 떨렸다. 왠지 오른쪽 턱 아래 멍울 있었던 자리가 뻐근한 것 같은 기분 탓, 요즘 귀며 눈썹이며 뾰루지가 자주 올라오는데 이것도 일종의 염증이라면 안 좋은 징조 아닐까 하는 기분 탓, 언제든 나의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이 또 스탑 될 수 있다는 두려운 기분 탓을 누르고 그저 아무 일 없게 해 달라는 기도만 되뇌었다.





- 아기 많이 컸죠? 사진 좀 보여주세요!


항암 이후 3개월마다 보는 교수님은 인사 대신 나다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오늘 데려오려고 했는데 미세먼지가 심해 그럴 수 없었다는 말과 함께 주섬주섬 사진을 꺼내 보여드렸다.


- 너무 귀엽네요. 많이 컸네요! 지금 몇 개월이요?

- 이제 9개월이요! 진짜 많이 컸어요. 다음에 꼭 교수님께 인사드리러 같이 올게요.

- 다음에 날씨 좋은 날. 오늘은 공기가 진짜 너무 안 좋아요. 다음에 같이 오셔요.



- 아, 그리고 검사 결과는 피검사 만점이고요, 재발 없고요, 엑스레이도 깨끗합니다. 5월에 다시 뵐게요!



교수님께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하고 나오면서 나는 1층 로비에서 먹고 싶었던 라떼를 한 잔 샀다. 자축의 라떼였다. 커피를 받아 들고 기쁘게 병원을 나오면서 또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앞으로 몇 번의 라떼를 사 먹게 될까.


브런치 글 이미지 1








작년 생일은 의도치 않게 암밍아웃의 날이었다. 암진단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생일이었기 때문에 아직 내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다 알릴 필요도 없었지만 '몸은 좀 어때? 지금 임신 몇 주차지? 잘 지내고 있어?'라고 묻는 내 사람들에게 거짓말로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생일날 선물을 보내며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사실은 얼마 전에 혈액암을 진단받았다고, 그래서 출산 전에 방사선 치료를 먼저 받게 되고 유도분만으로 조기 출산 한 이후에 항암을 하게 될 거라고 대답했다.



듣는 사람도 놀랐겠지만 말하는 사람은 더 괴로웠다. 기도한다고, 힘내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나는 생일에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축하한다와 고맙다로 간결하게 지나갔던 그동안의 생일들이 얼마나 축복이고 큰 기쁨이었는지도 그때 알았다. 나는 무표정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고마워, 기도부탁해'를 연달아 대답하며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그때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생일인데 오늘 맛있는 거 먹었냐고. 나는 그 친구에게만 나의 진짜 마음을 털어놓았다. '나 사실 너무 우울해.' 그러자 친구에게서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사실은 나도 그렇다고. 친구는 나의 암 진단 소식을 들은 이후로 아무 맛도 안 느껴지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너무나 무력하고 우울하다고. 그래서 사실은 얼마 전에도 길을 걷다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고.



나는 그 메시지를 붙들고 소리 내어 울었다. 나 사실은 항암도 하기 싫어, 방사선도 하기 싫어, 나 다 무서워. 무서워. 애써 우울하지 않은 척 답장하며 버텼던 것들을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계속 계속해서 울어댔다.








그리고 그로부터 벌써 1년이 지나, 내일은 다시 내 생일이다.

아무것도 갖고 싶었던 게 없고 먹고 싶었던 게 없었던 작년 생일과 다르게 이번엔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다. 가장 하고 싶은 건 시원하게 고속도로 타고 강원도 바다를 보는 것이었는데, 오늘 검사결과를 듣는 날이라 여행을 계획하진 못했다. (*3화 참고. 태교 여행 가기 전에 검사 결과 들으러 갔다가 암진단받은 바 있음)



내일은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셋이 인생네컷도 찍을 것이다. 저녁에 어머님 아버님이 잠깐 나다를 봐주면 남편이랑 둘이 처음으로 오마카세도 먹을 것이다. 그렇게 온전하고 아주 천천히 생일을 누리고 즐길 예정이다.







3개월마다 검진 가는 게 썩 유쾌한 건 아니지만, 검사결과를 듣고 나오면 그렇게 발걸음이 경쾌할 수 없다. 나 또 3개월 잘 살았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쭉 달리는 인생 괜히 나만 3개월마다 멈칫 멈칫 세워서 '너 괜찮아? 너 진짜 괜찮아?'하고 묻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아무렴 뭐 어떠한가.



'어, 괜찮아. 나 건강하대!'


3개월씩 삼백 번이라도 이렇게 살아있으면 된 거 아닌가. 나중에 보면 남들과 똑같이 건강한 한평생이다.



그럼 다시 또 3개월을 잘 살아내러, 기쁘게 이만 총총!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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