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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을 얻고 얻은 기쁨

by 다람북 Jan 0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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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한창 <시크릿>이라는 책이 유행했었다. 대략 좋은 생각을 하면 우주의 좋은 기운을 끌어당겨 결국에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다는 내용인데 수능이라는 문턱을 코앞에 둔 우리들은 우주가 아니라 우주 먼지의 기운이라도 끌어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해야 했기 때문에 너도 나도 <시크릿>을 손에서 놓질 못했다.



그 책 읽을 시간에 영단어 한 자라도 더 외우라는 선생님의 으름장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왠지 그런 책을 읽고 나면 묘한 반발심 같은 게 생겼다. 내가 생각한 대로 다 이루어져, 다 잘 될 거야라는 식. 혹은 내가 원하지 않는 대로 일이 벌어지면 다 이유가 있고 결국엔 나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그렇게 되었다는 식의 말들은 다 '억지 긍정'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억지 긍정은  <시크릿>만 해당하는 건 아니고 내 눈엔 대체로 자기 계발서의 책이나 에세이는 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억지 긍정, 억지 감사. 어떤 일을 겪고 이런 것들이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글들은 그저 글을 위한 글 같았다. 아니 애초에 그 일을 안 겪고 기쁘고 감사한 일들을 맞이하면 안 되는 거야? 나는 글쓴이들이 말하는 기쁨과 감사에 좀처럼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끝에는 진짜가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책을 넘겼다.



그런데 그런 내가 지금 이런 글을 쓴다. 세상에. 그것도 암을 얻고 얻은 기쁨이라니. 17살의 나였다면 '암을 얻지 않고는 기쁨을 알 수 없는 거야?' 하고 빈정댔겠지만 정확히 그 나이의 2배 정도 더 산 지금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암을 얻었기에 알 수 있는 기쁨'이 있다고.








예전의 나는 머리를 자주 짧게 잘랐다. 긴 머리를 위해 시간을 들여 애써 길러놓고 느닷없이 짧은 단발로 자르기 일쑤였다. 다음날 사람들이 갑자기 왜 머리를 잘랐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내 대답은 똑같았다.


-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머리카락 밖에 없어서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교만한 말이었는지. 첫 항암하고 14일이 되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수수 빠지던 머리카락. 울면서 머리를 밀고 남은 눈썹보다도 짧던 머리카락. 그 마저도 샤워를 할 때마다 또 움직일 때마다 자꾸 빠져서 아기 속싸개로 머리를 동여매었던 시간들. 나는 그 짧은 머리카락이 목덜미며 베개에 박혀 나를 찔러댈 때마다 내가 했던 말을 두고두고 떠올렸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머리카락 밖에 없다니. 머리카락 밖에 라니요.


건강, 가족, 일, 인간관계, 꿈 그리고 나의 몸.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고 혈기를 부렸던 건 이 모든 게 다 내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거니까 내 마음대로 컨트롤되지 않으니 화가 날 수밖에. 그런데 이렇게 하루아침에 암환자가 되고, 고위험 산모도 되고, 항암 중인 환자도 되어보니까 내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그러니 머리를 자르러 가는 게 얼마나 나에게 큰 기쁨이 되었는지. 지난주엔 머리를 조금 다듬을까 싶어 미용실을 예약하려는데 전화를 하기도 전부터 마음이 두근거렸다. 머리를 밀고 난 후 첫 미용실이었다. 머리카락이 많이 길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듬을 수 있을 정도로 머리카락이 자란 것에 감사했고, 올해 안에 미용실을 다시 가게 된 것에 감사했고, 아직 가발 없이는 어색하지만 그래도 여차하면 가발도 모자도 없이 짧은 숏컷으로 다닐 수 있음에도 감사했다.



비단 이런 기쁨이 나에게 머리카락 하나뿐일까. 더 이상 손이 저리지 않은 것도, 손목의 통증이 점점 줄어드는 것도, 쇄골 부근에 케모포트 없이 그저 흉터만 남아있는 것도, 소론도정으로 부어 있었던 턱선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다 눈부신 감사와 기쁨이 된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24년도가 지나갔다. 새해 첫날부터 대학병원 꼭대기에 입원하여 여러 검사들을 받고, 의료대란 속에서 조마조마하며 방사선 치료를 받고, 2번의 유도분만 실패 끝에 기적처럼 자연분만으로 나다를 만나고, 출산 후 2주 만에 항암을 시작하고, 머리를 밀고, 견디고, 버티고. 이 모든 게 언제 끝나나 싶었는데 정말 언제 끝났나 싶게 다 지나갔다.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가 없었던 시간들이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것처럼 이제는 이 시간들을 겪기 전의 내가 가물가물하다. 재밌는 걸 해야 재밌다고 느끼고, 자극적인 것을 먹어야 맛있다고 느끼고, 꼭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내가 증명되는 것 같았던 시간들. 항암이 정상세포와 암세포를 함께 죽이는 것처럼 잠깐 나는 일상생활이 어려울 만큼의 체력과 건강을 잃었지만 나를 갉아먹고 있던 좋지 않은 생각들도 함께 잃게 된 것 같아 이 또한 기쁘다.




암세포는 죽고 정상세포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온다.


내 삶은 암을 얻고 더 분명한 기쁨을 얻은 게 틀림없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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