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은 끝났지만 본격적인 육아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동안은 엄마가 집에 머물며 도와주기도 했고 남편도 육아와 간호를 전담했지만 이제는 나를 비롯하여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남편의 경제활동은 우리 집 가계와도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나도 마냥 남편의 케어를 바랄 순 없었다. 다행히도 항암이 끝나자마자 남편은 이직에 성공했고 덕분에 나는 가슴에 심은 케모포트를 제거하기도 전에 독박육아의 문이 열렸다.
조금 이른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토록 바라던 일상이었다. 하루종일 아기랑 씨름하고, 울고 웃고, 새벽에 밤잠 설쳐가면서 수유도 하고. 누군가에겐 지루하고 버티기 힘든 이 평범한 육아의 하루일 테지만 나도 꼭 그 입장에 서서 '너무 힘들다, 얼른 육퇴 하고 싶다!'를 외치는 평범한 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편으론 얼른 1인분의 몫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나다를 출산하고 함께 집에 있었지만 항암을 하고 있던 나는 신생아와 마찬가지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엄마도 남편도 나다가 잘 자고 잘 먹는지를 체크하는 것만큼이나 내가 잘 자고 잘 먹는지를 확인했다. 그게 늘 미안했다. 나도 아내로, 또 부모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항암을 하고 있단 이유로 아무것도 제대로 맡아서 하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남편이 출근을 해도 되겠냐 물었을 때 흔쾌히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나다는 이미 예전에 졸업한 속싸개를 나는 아직도 머리에 두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무조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육아는 만만치 않았고 생각만큼 내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적막해진 집에 3개월 아기랑 덜렁 단 둘이 하루를 보내는 건 꽤나 긴장되는 일이기도 했다. 항암 부작용으로 아직도 저릿한 손으로 찬물에 젖병을 씻고, 분유를 먹이고, 스스로 잠들지 못하는 아기를 안고 돌아다니며 재우고. 특히 나다는 등센서가 예민하여 침대에 눕히면 어김없이 눈을 번쩍 떠버렸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턴 나다가 잠들면 아예 깨지 않게 같은 자세로 몇 시간이고 망부석처럼 있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나다를 품에 안고 있으면 목도 어깨도 허리도 빳빳하게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 그러니까 너무 오래 안고 있지 마. 잠들 것 같으면 침대에 내려놓아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안고 재울 수 없어. 우리도 수면교육 해야지.
남편은 피곤하다 못해 까매진 내 안색을 보며 더욱 수면교육을 해야 한다 했지만 사실 나는 그럴 힘이 없었다. 수면교육에서 말하는 방법은 아기가 잠에 들랑 말랑 하면 침대에 내려놓고 아기가 침대에 등을 댄 상태에서 잠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깨서 울더라도 바로 반응해주지 말고 아기가 스스로 잠들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침대에 내려두면 다시 처음부터 재우기 시작해야 하는걸. 온 힘을 다해 아기를 재웠는데 침대에 눕히다가 깨면 다시 안고 거실을 돌아다니는 것부터 해야 한다는 게 더 피로했다. 방법을 몰라서 또는 아기가 안쓰러워 품에 안고 싶은 마음에 수면교육을 안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남편이 걱정돼서 하는 말인걸 알면서도 어떤 때는 서운했고 어떤 때는 화도 났다.
남편과 다투기도 많이 다퉜다. 남편과 이 큰 산들을 넘어오면서 한편으론 정말 우리가 특별한 경험을 한 만큼 더욱 각별하고 특별한 부부가 되었다고도 생각했는데 일상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투닥대는 것이 참 웃기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벽수유를 끊지 못한 상황에서 출근하는 남편이 더 푹 쉴 수 있게 새벽에 수유를 도맡아 하다가도 그 피곤한 컨디션으로 하루종일 독박육아를 하려니 예민해졌고, 남편은 남편대로 출근과 육아와 살림을 다 커버하려다 보니 여러모로 힘에 부쳤다.
그런 상태로 한두 달을 어떻게든 버텼더니 결국 손목이 나가버렸다. 처음엔 왼쪽 손목만 찌릿하더니 곧이어 오른쪽도 같은 증상을 보였다. 산후풍이겠지 하고 넘기기엔 너무 강렬한 아픔이었다. 결국 야간진료 하는 통증의학과를 찾아갔더니 양쪽 손목 모두 건초염 진단을 받았다. 세상에. 항암 끝나자마자 이제 손목건초염이라니요. 정말 이마를 탁 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겨를도 없이 빨리 나아야 육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체외파 충격치료도 받고, 물리치료도 받고, 약도 꼬박꼬박 먹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목은 나을 기미가 없고 되려 밤만 되면 악몽을 꾸고 급격하게 무력해지고 우울해졌다. 자다 말고 새벽에 혼자 일어나 티슈 한 통을 다 쓸 정도로 펑펑 울기도 했다. 암에 걸렸을 때도, 항암을 할 때도 이렇게 우울한 적은 없었는데 손목건초염 치료받는 기간 동안 그렇게 우울할 수가 없었다.
- 여보, 약을 먹지 않는 건 어때?
밤에 아무 이유 없이 또 눈물짓고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말했다.
- 약? 왜? 그거 먹어서 그래도 손목 통증이 조금은 덜한 것 같은데?
- 병원에선 당연히 정량을 지켜 약을 처방해 줬겠지만 내 생각에 여보가 항암을 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양약을 먹으니까 몸이 감당하기가 힘든 것 같아. 약 그만 먹어보자.
생각해 보니 약을 먹기 시작한 날부터 무력하고 우울감에 빠지기 시작했었다. 맞아. 나 항암 했던 몸이었지. 항암 했던 적이 아주 오래전 같은데 불과 한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렇게 약도 먹을 수 없는 상태로 손목건초염을 달고 눈물의 육아가 진행되었다. 이유식 의자에 앉힐 때 손목이 아파서 울었고, 나다가 안아달라고 하는데 마음껏 안아주지 못해 속상해서 울었다. 손목을 쓰지 않아야 손목이 좋아질 텐데 9kg이 넘는 아기를 하루종일 안았다 내렸다 하니 손목이 나을 새가 있나.
출산 후 산후조리원을 못 가고 바로 항암을 해도 그다지 서럽지 않던 나였는데 왠지 이건 자꾸만 서럽고 화가 났다. 그렇게 일상을 소망했으면서 너무 빠르게 일상에 혼자 던져진 것에 대한 불만도 피어올랐다. 사람 마음이란 어쩜 이렇게 간사할까. 평생 감사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아낼 것처럼 항암을 마쳐놓고 뒤돌자마자 억울하다고 투정이라니.
그래도 나는 지난 시간들을 통해 '감사하며 버티는 것'에 대해 배웠다.
감사하다는 것과 버티는 것은 얼마나 이질적인가. 사람들은 감사한 상황이 주어지면 감사하다고 말하고, 견디기 힘든 순간이 오면 버틴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감사하며 버티다니요. 언뜻 들으면 '뜨거운 아아 주세요'와 비슷한 표현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것, 다 그만두고 싶은 상황에서도 그저 버틸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진짜 힘든 상황을 만났을 때 그 과정을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된다.
그러니 육아도, 손목건초염도, 항암후유증도 다 어쩌겠는가. 감사하며 버틸 수밖에.
오늘도 양손목 부여잡고 감사하며 버텼더니 달콤한 육퇴가 다가왔다.
그렇게 또 하루를 기쁘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