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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회사뎐

호모 카페이니쿠스

커피를 미워하게 될 때, 커피를 사랑하게 될 때

by Le Studio Bleu

<< 커피,커피,커피~~ >>


쓰러진 직원들도 일으킨다는 악마의 음료


사업기획 부서에 있는 직원들이면

항상 시달리는 시간, 연말연초~ 사업계획 시즌.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는 엑셀표를 이리저리 만지며, 여러 부서에서 보내준 자료들을 취합하고 전화를 잡고 있었다.


사업계획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막연한 미래를 숫자로 나타내는 작업이다.


일종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똑같다.


영업 부서에서 얼마를 내년에 벌어올게요,

그래서 우리는 얼마를 써야합니다,


인사 부서에서 내년에 얼마나 사람들을 뽑을거예요, 단체행사는 이만큼 해야 해서 써야해요.


연구 부서에서는 내년에 이만큼 써야하구요,

써야하구요, 또 써야해요.... (흠~!!!)


여러 부서에서 나에게 던져준 숫자들이 나의 손을 거치면서, 이리저리 모아지고 수정되고, 결국 돈을 남기는 방향으로 짜여진다.(이 정도면 숫자상으로는 나는 마이더스의 손이다~!)


이렇게 자부하는 나의 계획도 위로 올라가면,

하나 둘..... 아니 한 두 달은 거뜬히 다시 다듬어야 한다. 윗분들은 아무리 봐도, 나의 정성어린 결과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가 보다.


이 시기가 되면 항상 줄다리기가 시작이 된다.


올린 예산을 삭감당하며 난도질당하는 현업 부서들과, 자기가 왜 더 많은 비용을 떠안아야 하냐고 절규하는 관리부서들.


옆 회사는 이 시기에는 모텔도 잡아주더라 하면서,

그런 걸 부러워하던 신입사원들인 우리에게 (그래 봤자 집에는 못 들어가는 같은 난민들이면서), 선배들은 항상 마법의 음료를 입에 들이부었으니, 그것은 바로 '카페인' 가득한 커피였다.



호모 카페이니쿠스~~ 카페인은 나의 힘~!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진, 나에겐 커피는 입에 대서는 안 되는 악마의 음료였다.


카페인은 몸에 안 좋을 거란 굳건한 믿음도 믿음이 거니와, 왠지 차 마시는 사람이 뭔지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도 나는 커피보단 차였다.

그때는 나름 나의 향기에 나는 취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도 회사에 들어가선 어쩔 수 없이 이 마법의 음료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경비 절감을 입에 달고 사는 제조회사에서 그것도, 타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재경부서에서 탕비실을 풍족하게 할 수는 없는 일.


회사에서는 항상 봉지에 들은 믹스커피들만 가득가득 넣어놓았기 때문이다.


한 번씩 회사 로비에 있는 별벌래 카페에서 '나때' 커피라도 사오면 선배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곤 했다.


"요즘 젊은것들은 달라" 부터 시작해서,

"사내놈이 되어가지곤 좋은 것만 찾네' 하는 소리까지.(그때 그 말 하던 선배들! 지금은 책상에 별벌래 텀블러 하나씩 있다에 내 전재산과 왼손을 걸....^^;;;)



<< 탕비실의 추억 >>


너무 현실적이라 반박을 할 수 없는~~!!!


커피를 마시는 탕비실은 어린 사원들의 성지였다.


한참 일을 하다 피곤할만하면, 우리는 어김없이 탕비실에 들어가 커피를 타면서 각자 팀들의 정보를 교환하곤 했다.


보통 술자리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지만, 매일 야근을 하니 이런 곳에서나마 서로 얼굴을 볼 수밖에.


새로 들어온 신입직원들과 부서에서 가장 어리던 여직원들에게 탕비실은 일종의 해방구 이기도 했다.


나이 많은 아저씨들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던 여직원들과, 매일매일 영혼까지 털리던 신입사원들이 모이면 커피를 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안 봐도 뻔하지 않을까?


그날 아침도 여느 날과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반 시간 일찍 나와 사무실 세팅하곤, 선배님들 오는 길을 모두 영접(?)하곤, 숨 좀 쉬어보려고 들어온 탕비실 안.


옆에는 나와 같은 입사동기 K형이 있었다.

언제나 입담 좋던 형님은 오늘도 상기된 얼굴로, 어제 회사에 있었던 많은 일들에 대하여 아나운서처럼 해설을 해주고 있었다.


한참을 재미있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리들 앞으로, 부서에 나이 어린 K 씨가 들어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회사는 대기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녀 관계없이 모두들 OO 씨로 호칭하는 문화가 있었다).


오늘따라 K 씨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K 씨(님이 맞겠지만), 무슨 일이에요?"


한껏 눈에 독기가 서린 나이 어린 K가 말을 이었다.


"새로 온 이사님 있잖아요."


아하~ 조직개편으로 새로 오신 Oh 이사님이 문제인가 보다.


회사의 많은 임원분들로 인해, 같은 임원임에도 불구하고 '이사' 직급은 어린아이 축에 속한다.

그러다 보니 아직까지 예우에서 차이가 나는데, 그중 하나가 임원의 특권인 '비서'를 둘 수가 없다는 것.


하지만, 새로운 임원이 탄생하면 잘 보이자 하는 부서별 팀장들 덕분에, 팀에서 가장 어린 막내들이 그 조직상엔 존재하지 않는 '비서'의 역할을 맡아서 수행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번에 'Oh' 이사님이 이 부서로 넘어오면서, 부서에서 막내였던 K 씨가 그 업무를 떠맡게 된 것이다.


우리는 측은하게 K 씨를 바라보았다.

그날 아침은 또, 커피맛이 없다고 타박을 들었는지 안색이 붉으락 푸르락 하고 있었다.


"음, 그냥 이사님.

저기 커피 타서 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눈치를 보며 이야기하는 우리들.

그런 우리에게 발끈한 K 씨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저 ㅅㄲ 는 타는 커피는 마시지도 않는다구욧~!"




그렇다.


소주를 물처럼 마시고 외모는 우락부락한 스모부 주장처럼 생기셨던 'Oh' 이사님이 무슨 바람이 부셨는지, 드립커피를 사랑하게 되신 거다.


어느 날인지 우리 탕비실에는 전에는 볼 수 없던 곱게 갈린 커피가루가 보이고, 거름종이 필터지까지 갖춰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커피라곤 믹스커피 밖엔 구경하지 못하던 우리는 과연 저 커피의 주인공이 누굴까 궁금해했다 (커피 보관병에 붙여진 '사용금지' 라는 딱지는 더욱 그 궁금증을 부추겼다).


오늘에서야 나는 그 커피병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제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출근을 하던 K 씨의 입장에선 이젠 아침마다 죽을 맛이었나 보다.


졸지에 한약 달이듯 아침부터 커피를 끓이고, 바리스타처럼 드립퍼에 물을 정성스럽게 따라내야 하는 업무를 떠안게 되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갑자기 문화인이 되신 Oh~이사님은 커피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맛이 쓰네, 다네, 싱겁네...' 여간 까탈스러운 게 아니었던 것 같다.


한껏 짜증을 부리며 커피를 가지고 나가는 K 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와 동기형은 물끄러미 그렇게 그녀가 사라진 탕비실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배달 과정에서 이사님의 커피는 무사할까?

솔직히 그런 걱정도.들었다.)


형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 날 탕비실에서 나는

일생일대의 교훈 하나를 깨달았다.


'직장 생활에서 커피는 남들에게 타라고 시키면

안되는 것, 내 손으로 직접 타서 마시는 것~!'


모두가 '그냥 해줄 수 있잖아' 라고 생각하는

<작은 커피 한 잔> 이, 누군가에겐 엄청난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키는 <짜증 나는 커피 한 잔> 이 되는 현장을 직접 눈 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평생의 교훈을 체험한 그 날 이후로, 직장생활 에서 든지 사회생활 에서 든지 내가 누군가에게 직권으로 '커피'를 주문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내 손으로 타서 마시길 항상 권장했다

(남자가 커피 타면 왜 안돼?).


그렇게 내가 관리직이 되어서도 직접 커피를 내어줄 때면,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선 여러 재미있는 반응들이 나오곤 한다.


어떤 상사들은 이런 나의 접객 태도를 불편해하기도 하고, 어린 직원들은 대부분 황송해하며 고마워한다(물론 나도 어리지만 ^^???)


그리고,

음~~ 벌써부터 싹이 보이는 소수의 'Oh 이사님' 후보군들은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나에게


"그걸 선배님이 왜 타세요?

그런건 여직원들 시켜요."


라고 일깨워줄 때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조용히 그들을 불러놓고 이야기하곤 했다.


"너도 누군가에게 'ㅅㄲ' 가 되고픈 거냐?"

그 날 이후, 이런 그림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할지...

<< 그래도 커피 >>


커피를 찾아 다니던 어리던 나의 모습


짧았던 첫 직장생활을 끝내고 내가 지원했던 필리핀의 국제협력 프로그램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맡았던 프로젝트는 '커피' 였다.


풍부한 화산토양을 가지고 있는 필리핀,


더운 열대 생활에서 당분 가득한 커피는 항상 나에게 활력소가 되어주었고, 커피나무를 너무나 사랑하던 낙천적인 농부들과 이야기하는 건 언제나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우리가 마시는 커피가 다 같은 커피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라비카', '루브스타', '엑셀시아' ... 자신들의 예쁜 이름이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문화인이 되고자 하셨던 'Oh 이사님'의 입맛이 왜 그렇게 까다로워 지는지(?)도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월급도 수 십배로 받으시던 분이,

2층 로비의 별벌래 카페를 이용하지 않았을까?)


커피는 그만큼 매력 있는 음료다.


그러기에 알라를 모시는 무함마드 선지자는 이슬람 신도들에게 술 대신 '커피'만 마셔도 인생 살아가는데 충분하다고 못 박아 버렸고,


예수님을 모시는 교황님께서는 전쟁터에서 주워온 적들의 음료인 커피콩에 성수로 셰례까지 내려가면서 마시려 하지 않았던가~!


장황하지만 결론을 내리자면,

나도 어느 순간 '호모 카페이니쿠스' 가 되어버렸고, 커피 카페인으로 밤을 지새우는 야근 대열에 지금도 동참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커피를 내 손으로 타서 마시고, 누군가에게 시키기가 꺼려지는 건, 아직 사원증 잉크도 마르지 않던 어린 사원 시절 보았던 K양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있어서일 거다.


아침에 잠깐 커피를 내리며 향기로운 내음에 행복해 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아기 엄마가 되었을 K 님은 누구를 위한 커피를 내리고 있을까? 알길은 없지만, 이제는 오롯이 자신을 위한 커피를 내리며 이 고소한 향기를 마음껏 느끼고 있기를.



(PS)

질문 하나,

세상에서 가장 맛난 커피는 어떤 커피인가요?


몇 년 전 이맘때,

중국의 사무실에서 정신없이 야근하며

사업계획 숫자를 맞추던 나.


그날도 믹스커피 봉지를 뜯곤

정수기 앞에서 물을 받으려 서 있었다.


"과장님~~~!!!"


갑자기 놀란 목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국 직원 L 님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한 손에는 컵을 들고 정수기 앞에 서서,

다른 한 손으로 뜯어놓은 믹스커피를 쓰레기통 안으로 부어 넣고(?) 있었다!!!


커피를 타고 봉지를 버려야 하는데,

그만 그 순서도 까먹곤 멍해진 거다.


"앗.... 내가 요즘 무리했나봐요."


민망해진 나는 황급히 자리를 나와서 화장실로 향했다. 며칠 동안 야근을 했으니 몸과 영혼이 분리될 만도 하지.


찬물로 세수하고 돌아온 나의 자리 위에,

종이컵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믹스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과장님, 쉬어가면서 일하세요."


L 님이 써놓은 포스트잇의 중국어를 보면서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회사 안에서 처음으로 받아본

누군가가 만들어준 따듯한 믹스 커피 한 잔.


시간이 지나도 그 커피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되는 건, 작은 커피 한 잔 속에서, 누군가 나를 생각해준다는 진심이 전달되어서가 아닐까?


<< 오늘도 커피 향기에 취한 호모 카페이니쿠스의 넋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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