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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아키 Sep 22. 2023

우표를 사고 돌아오며

명절맞이 글

장을 보고 돌아오던 길. 이미 출발 전에 낮술로 맥주 한 캔을 들이켠 뒤였기에 - 안 마셨어도 운전을 하진 않았겠지만 -  뒷좌석에서 얌전히 앉아있다가, 방향이 잘못된 걸 깨달았다.


"여기가 아니고 OO 우체국이에요."


부득불 집으로 잘 향하던 차를 돌려 우체국에 내려 굳이 굳이 기념우표('떡볶이와 순대')를 사서 차로 돌아와서, 자랑스레(?) 우표를 보여준다. 예전 같으면 유치하다고 또 한바탕 타박을 들을 타이밍이지만, 이미 여러 차례 이뤄졌던 다른 형태의 기행에 익숙해진(?) 탓인지 부모님 모두 그냥 이 상황을 '받아들이곤' 만다. 출발 전에 먹고 싶다고 했던 활어회가 담긴 장바구니 옆에 우표를 고이 놓고선, 다시 집으로 향한다. 평화로운 오후 4시. 일에 갑자기 여유가 생겨 널널하게 대휴를 쓴 지 5일 차 되는 날의 평화로운 오후.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라면서 가계의 경제적 상황이 여유로웠던 적은 거의 없었다. 모두가 치열하게 살았지만 그것이 경제적 여유로 이어지진 않았다. 자연스레 유예하고 미뤄둔 것이 많았고, 입 밖으로 무언가를 요구하기 전 스스로 많이  포기했다. 어린 나는 훨씬 더 고집스러웠고 자존심이 셌기에, 그 나이 때 아이들과 같이 구는 대신 괜히 어른인 척하는 귀여운 맛이 없는 철든 '애늙은이'로 스스로를 위장했다.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스스로 압력밥솥으로 밥을 해 먹는 법을 배웠고, 이후로도 하나둘 살림을 배부모님의 부재 때 집을 유지하는 법을 익혔다.


그땐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경제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여유가 훨씬 더 많이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 딱 바라던 나이의 어른이 되었지만, 삶은 사실 기대했던 것만큼 드라마틱하게 변하진 않았다.


오히려 더 힘들었다.


취직 후 한동안 정말 앞만 보고 달렸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빠른 '적응'과 '정착'을 위해 일했다. 연휴도, 주말도, 가정도, 삶도 다 미뤄뒀다. 집에 가지 않는 게 나름의 미덕이었고, 이십 며칠 연속으로 출근하는 걸 당연히 여겼다. 명절의 '부재'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어서 - 오히려 그 무렵이 더 바쁜 날들이 많았다 - 차려진 차례상에 절만 하고 다시 회사로 향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조급했고, 항상 불안했다. 부쩍 체중이 고 짜증이 많아졌다. 삶에 절어 있는 상태였기에 필요한 잔소리마저 들을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었다. 갈등은 반복됐고, 말들이 점점 세지기 시작했다. 집을 나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을 하게 되기 시작하고 삶 전반에 여유가 생겼다. 그러고 나니 문득 잃어버린 것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일을 거의 쉬게 된 아버지는 내가 이제껏 알았던 것보다 훨씬 감정적이고 말이 많은 사람이었고, 나이가 든 엄마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단 쿨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밝고 강한 사람인 채였다. 나는 나이를 점점 거꾸로 먹어, 철이 없어지고 애같이 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해 온 잰 체를 바로 내려놓기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씩 가볍게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려고 한다. 무엇을 더 가지려, 무엇을 더 얻으려 노력하는 대신 지금 있는 그대로에 행복을 느끼고 이를 지키려 애를 쓴다. 조금이라도 이 삶을 더 지키기 위해, 말을 다듬고 감정을 조절하며 삶을 따뜻하게 해보려고 노력한다. 지금의 이 삶과 행복을, 지금처럼만 지켜내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그렇기에 지켜내야만 하는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여전히 삶은 순탄치만은 않아 많은 부분이 삐걱거리고, 갈등과 걱정도 많다. 집에서 나와 혼자 살고 싶은 마음도 그대로. 그래도 하루 정도는 모두가 다 함께 장을 보고 와서 중국술 한 잔씩만 나눠마시고 여유롭게 남은 저녁을 보내는 일상이 지금의 내겐 있다.  또다시 지고 있는 야구 경기를 묵묵하게 보고 있는 아버지와, 영화를 보자고 보다가 체념하고 옆에서 차를 마시다 말고 갑자기 운동을 시작한 엄마 옆에서 평일 저녁 시간에 집에 앉아 글을 쓸 수 있다.


언젠가 다시 일이 바빠져 이런 일상을 다시 잃고 다시 쫓기듯 치열하게 부딪히는 '전쟁터'로 돌아가야만 하는 순간이 오겠지만, 그전까지는 이 일상과 삶에 대한 태도가 몸과 마음에 스며들 수 있도록 발버둥 쳐보려고 한다. 점점 더,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에.


적어도 내가 마음먹으면 지켜낼 수 있는 것들만큼은 놓치지 않도록.


후회하지 않도록.


그저 애를 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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