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점심시간에 떠난 짧은 여행
지극히 느슨한 회사의 이상한 구조에서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는 나이 어린 여성을 나는 여러 번 지켜보아 왔다. 오늘 만난 그녀는, 그녀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 있던 다른 여성-이제는 내 친구가 된-을 떠올리게 한다. 예전에 그 자리에 있던 친구가 어이없고 아프게 조직에서 떨어져나간 과정을 지켜본 뒤로, 나는 조금 마음을 닫고 있었다. 전임자가 겪었을 상처를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업무를 넘겨받은 그녀는 꾹꾹 숨겨왔던 아픔을 기침하듯 내뱉었다. 뱉어진 그녀의 말은 흩어지지 않고 나의 귀 언저리에 붙었다.
오며가며 그녀와 마주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앞니를 손으로 가리면서 땅 밑을 수줍게 쳐다보고 과도하게 들린 어깨짓을 하며 멋쩍게 웃는 동작은 쉽게 수줍어하는 기질을 투명하게 드러내보여준다. 그녀는 그런 특유의 몸짓과 웃음을 띠며 내게 인사를 해주었고, 나는 그녀가 얼마나 힘들지 짐작이 가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며 인사를 되받아주곤 했다. A씨, 한 번 밥 같이 먹어줘요.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더라고요. 비정규직의 대모라 불리는 노조 간사 B씨가 어떤 점심 식사 자리에서 내게 호소하듯 말했을 때도, 나는 정말이지 그 만남을 최대한 회피하고 싶었다. 비겁한 변명 같지만 내게는 적어도 2주는 밀린 약속이 있었고, 어쩌다 그녀가 생각나면 그 다음 주의 약속이 잡혀있는 상황이 오곤 했다. 어쩌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점심시간이 생기기라도 하면, 당장 회사 근처에 있는 서점으로 도피성을 향해 가듯 뛰쳐들어갔으므로 그녀는 머릿속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런 그녀로부터 점심을 하자는 연락을 받고는,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겠다싶어 바로 약속을 잡았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은, 메뉴가 고정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늘 쉽지가 않다. 가리는 음식 있어요? A와 점심을 먹기로 약속한 날, 그러니까 오늘 아침, 나는 그녀에게 점심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메뉴를 논의했다. 딱히 가리는 것 없어요^^ 라며 웃는 이모티콘이, 어떤 상황에서도 웃어야만 하는, 웃을 수밖에 없는 그녀의 모습같이 느껴졌다. 회사 앞에서 그녀를 기다린지 얼마 되지 않아 A도 바로 약속 장소에 나왔다. 못 본 사이에 어깨 위로 머리를 짧게 짤랐나보다. 반묶음을 했는데도 옆머리가 많이 흘러내린 상태였다. 머리 잘랐네요! 웃으며 그녀에게 안부의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또다시 특유의 몸짓을 하며(이번엔 손을 입으로 가지고 가는 게 아니라 흘러내린 옆머리와 반묶음한 머리를 두어 번 만졌다.) 네, 너무 짧게 잘랐어요. 제가 졸고 있는 사이에 이렇게 되어 버렸어요. 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녀의 수줍음에 나까지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들었다. 점심 뭐 먹을까요, 생각한 거 있어요? 딱히 낭비벽이 심한 것도 아닌데 엥겔지수가 유난히 높은 내 카드내역서를 보고 긴축재정에 들어간 지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오늘이었다. 나는 이전처럼 호기롭게 1인분에 만 원이 넘는 식당을 선뜻 제안하지 못했고, 그래서 더욱 수줍은 그녀처럼 머뭇거렸다. 나의 머뭇거림은 여전히 내 옆에서 선배를 대면하는 어려움으로부터 비롯된 그녀의 어쩔 줄 몰라하는 수줍음을 증폭시켰다. 둘이 나란히 회사 문 앞에 어정쩡하게 서서 두리번 두리번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한동안 그렇게 이어졌다. 예상 외로 그녀가 제안한 된장찌개 집이 나름 저렴하면서 맛도 괜찮은 곳이어서 어색한 분위기는 방향을 잡아갔다.
많이 힘들죠? 내가 던진 말을 그녀는 애써 참아가며 받았다. 처음엔 많이 적응도 안 되고 힘들었는데, 지금은 이해하게 됐어요. 사람들이 저를 다들 걱정해주시더라구요. 그랬어요? 그렇다니 다행이긴 하네요. 나는 무언가 풀리지 않은 찝찝한 기분으로 말을 흐렸다. 소리지르거나 협박하는 건 안 해요? 곧이어 내 입에서 나온 질문에, 그녀는 생각보다 잘 아시네요, 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해가 안갔는데, 이제는 이해가 되더라고요. C 실장님이 그분 가정환경을 알려주셨는데.. 가정환경이 어땠는데요? 그분 두 형이 다 서울대 의대 나오셔서 의사하고 계시는데, 본인은 너무 다르니까 억압된 게 많았고.. 또.. 그래서 그걸 그렇게 표출하시는 거라고 이해하니까 또 이해가 되더라구요. 이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연신 어깨를 올리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이 대목에서는, 어색하다기보다는, 세상을 달관한 자의 씁쓸함이 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 같다.) 사모님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한 것 같다고 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왜 그녀들이 그를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 생각과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상태를 더 견디지 못하는 게 인간이 아니겠냐는 마음이 들어 그 마음마저 이해가 가버렸다. 밥을 한 술 뜨고 마른 기침하듯 고충을 내뱉는 그녀는, 그 와중에도 내 접시에 담긴 찌개가 계속 채워있는지 주시하고 (내가 계속 정말 괜찮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찌개를 담아주곤 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처음 만난 자리에 보통 어디에 사는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형제자매는 어떻게 되는지, 그런 시시콜콜한 신상에 대한 물음이 오고가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라는 공공의 적이 있었으므로 ‘그’와 연결된 ‘그녀’가 아닌, 그녀 자신에 대한 물음을 할 시간은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 형제자매가 어떻게 되는지는 그렇게 큰 궁금증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제부터 그렇게 아름답게 피아노를 쳤는지, 이런 가을날을 좋아하는지, 언제 태어났는지 정도의 질문은 그녀를 위해서라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분리된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때였다.
날이 좋으니 커피 들고 산책을 하자는 제안을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점심시간은 아직 꽤 많이 남아있었고, 답답한 고층 건물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가을을 알리고 있었다. 산책은 자연스러운 수순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인적도 드물고 길 양 옆에는 길게 뻗은 나무들이 있어 우리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네 살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만한 나이 때 나도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서 그런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피아노를 치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대회에 나가 상을 탔는데, 학교 정문에 그녀의 수상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걸 보고 그녀는 몹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했다. 그걸 보는 게 너무 창피했어요. 제가 드러나는 게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 말을 할 때만큼은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지 않았다. 그만큼 그 감정은 그녀에게 강렬했을 것이다. 보통 그런 걸 보면 기분이 좋지 않나요?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 때는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았어요.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든 자기의 일부가 드러나는 걸 끔찍하게 부담스러운 감정으로 여길 수 있나보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 같아요. 제가 회사 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밥을 먹었는데.. 이렇게까지 편안하게 제 얘기를 털어놓게 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왜 그러지? 진짜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정말 좋은 것 같아요. 한때 심리학을 전공해서 그런가, 아마 그래서 그런 걸거에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나를 편하게 여기고 속에 있는 말들을 쉽게 꺼낼 수 있다는 게 권력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나는 인터뷰어가 되고, 상대는 속절없이 침묵으로부터 건져 올린 말들을 늘어놓게 되는.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비밀을 알게 되는 일이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다. 상담이 지닌 허점에 신물이 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는 좋은 상담가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쉽게 판단하게 되는 내가 싫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보니 다리가 나왔고, 한 번 건너보죠, 해서 다리를 건넜더니 개천을 옆으로 끼고 산책로가 굽이굽이 나 있었다. 우리는 들뜬 기분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가끔 자전거를 타고 방금 그 다리를 건넌 적은 있지만 이렇게 걸어보는 건 처음이라고 했고, 나는 때마침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자애들을 보면서 사실 저 두발자전거 못타요, 라고 수줍은 그녀를 닮은 표정으로 부끄럽게 말했다. 개천을 지나 다시 회사가 있는 도로를 향해 건너면서 나는 어떤 계절을 제일 좋아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가을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다시, 어느 계절에 태어났느냐고 물었다. 11월에 태어난 그녀가 왜 가을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이 짧은 산책이, 마치 즉흥적인 여행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상에서 이런 여행이 많이 채워지는 게 참 행복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런 내 생각이 참 맞는 것 같다며 격하게 동의해주었다. 되게 좋은 것 같아요. 되게 시적인 것 같아요.
땅만 바라보며 웃던 그녀가 이젠 두 눈을 반짝이며 내 눈을 바라보고 미소지었다.
문득, 그녀가 가을을 닮아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