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콜벤 안에는 무수히 많은 인생이 있다.
만남의 성격과 상관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직전의 두근거림 같은 게 나에게는 여전히 있다. 잠시 머물던 거처를 옮기기 위해 부른 콜벤차량 기사와의 만남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를 만나기로 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그 짧은 관계가 가져다 줄 일종의 기대 같은 걸 했다. 콜벤기사와의 만남이 무슨 기대할 거리라도 되느냐는 질문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이상하게 나는 전화상으로 친절하게 짐을 옮겨주겠다던 기사님의 인성에 감탄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피아노 키보드의 다리 두 개를 해체하지 못했다는 말에, 기사는 “그래서 남자가 있어야 돼요”라는 말을 하시며 쉽게 다리를 분해했다. 평소라면 조금은 거슬렸을 법한 말이지만, 정말 나는 다리 두 개를 분해하지 못하여 몇 번이고 애를 쓴 뒤였기에,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4시에 올림픽대로를 타기 시작했는데, 퇴근시간인 6시를 피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시간이라고 여겼던 내 판단은 그릇된 것으로 드러났다. 4시가 지나면 다 막혀요. 60이 조금 넘어 보이는 기사는 체념 섞인 투로, 그러나 진지하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듯 내게 말했다. 콜밴을 통해 이동을 할 때는 먼저 값을 협상하고 이동이 이뤄지기 때문에 한시가 급해야 한 편은 나보다는 그였다. 그런데도 그는 어쩔 수 없죠 뭐, 이렇게 그냥 가는 거죠, 라며 되려 나를 달랬다.
“키보드는 취미로 하는 건가요?” 그가 던진 질문에 나는 내가 하는 음악이 분명 취미 수준은 아닌데도, 막상 음악으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지는 못하는 처지가 맞기에 “취미긴 한데, 계속 배울 거에요.”라고 짐짓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좋아하는 걸 하는 게 정말 좋은 것 같다며 직업 외에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개발해나가는 건 현명한 판단이라는 말을 했다. “음악이라는 건 정말 아름답잖아요.” 나는 그에게, 음악을 평생 하고 싶었으나 본업으로 삼고 있지 못하다는 생의 한계를 토로했다. 그는 그래도 계속 해보는 건 정말 다른 일일 거라고 말해주었는데, 그 말에 나는 이유 없이 용기를 얻었다. 그는 시드니에 사는 여덟 살 난 손주에게 키보드를 사주고 싶다고 했다. 키보드의 가격, 사용법, 성능 등을 자세히 묻는 그에게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대답을 해주었다. 피아노보다 소리가 다르죠? 네, 저녁에도 연습하고 싶어서 키보드를 샀어요. 이어폰을 꽂고 연습을 하면 소리가 안 들리거든요. 정말요? 그건 처음 알았네. 그는 아주 귀한 정보를 얻은 사람의 눈을 하곤 감탄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살이 별로 없는 그의 눈은 동그랬다.
어쩌다보니 나는 그에게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한다는 말을 하게 됐고, 그는 은퇴 후 남산도서관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문학강의를 받은 후 얼마 전 등단했다는 그의 친구 이야기를 해주었다. 주변에서 무슨 돈이 되냐며 말리는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의 친구는 어떤 문학재단이 주최하는 문학상을 수상하고는 연이어 몇 편의 단편을 냈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해야 해요. 좋아하는 걸 하다보면 잘 되게 되어 있어요.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는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별 것 아니지만 중국어로 숫자를 읽을 줄 알게 되니, 공항에서 중국손님을 태울 때 차량 번호를 알려줄 수 있었고 그의 말을 그들이 알아들어 재미가 더 생긴다고 했다. 중국어를 배우고 나면 러시아에 사는 애인과 소통하기 위해 러시아어를 배우려는 말도 덧붙였다. 러시아에 애인이 있어요. 여기 사진도 많아요. 키도 크고, 나이 차이가 좀 나는데 그쪽에서 나이는 상관없대요. 그는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수줍어하며 말했다. 아우 내가 별 말을 다 하네, 하며.
날이 점점 기울고 한강은 짙은 남색으로 바뀌어 갔다. 어느덧 한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는 15년 전 이혼을 했다. 사업의 실패 탓인지, 종교 갈등이 깊어진 탓인지 전처와는 늘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지금처럼 됐다고 한다. 딸은 전처와 서울에 살고, 아들은 말레이시아 여성과 시드니에 산다. 그를 제외한 가족은 모두 교회를 다니는데 그는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가족들은 교회를 나가지 않는 그를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그는, 어느 순간 세상의 기원에 대해, 그리고 기독교를 내세운 잔혹한 학살에 대해, 기독교 내부의 부패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나는 한 번 마음먹은 건 쉽게 돌이키지 않아요. 소년 같았던 그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찬 청년의 목소리를 닮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 교회에만 들어가면 그렇게 눈물이 나요. 옆에 있는 사람들한테 창피하잖아요, 너무 눈물이 나니까. 그래서 더 가기가 싫어요. 나는 이상하게 그가 신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감정이 이는 건 분명 그 관계가 살아있다는 증거로 여겨져서 말이다.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지난번에도 명동에서 어떤 권사님을 태웠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대. 심지어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더라고요. 아주 눈물이 나서 혼났어요. 왜 그러지. 어쩔 때는 그냥 하나님 왜 이러세요. 막 사춘기 소년처럼 대들고 싶다가도, 종교가 나약한 인간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나는 그에게서 뿜어 나오는 순수한 열망을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몇 마디를 던져봤으나 내게서 그리 도움이 될 말이 나오지는 않았던 듯싶다.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은 완전히 깊은 밤이었다. 우리가 서로 작별을 고하는 장면은 좀 우스꽝스러웠다. 그는 출발할 때부터 참았던 용변이 급하다며 힘들어해서 나는 짐을 내가 혼자 처리하겠다고 말했는데, 그가 잠시 두 손을 모으며 “운임..”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돈으로 엮인 관계였다는 게 그제야 깨달아지며 나는 황급히 지갑에서 돈을 꺼내들었다. 급한 생리적 용무 탓인지, 아니면 그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더 많아져서인지, 발그랗고 움푹한 볼의 그가 더욱 왜소해보였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소년 같은 그와 동행한 두 시간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그로 인해 (극히 작은 일부일지라도) 내가 느낀 감정적인 동요가 그 역시도 그러했을까. 설령 그러지 않았더라도, 11월의 초저녁 한강을 지나며 조우한 그와의 시간은 따뜻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