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걸 함께 누리는 우정을 키워나가고 있다.
바닷마을로 이사 오고 나서 먼저 했던 일은 동네 맛집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먹는 데 진심인 나는 나보다 앞서 여기 살았던 친구에게 맛집 족보(?)를 받아 각종 음식점을 추천받았다. 그중 하나가 오늘 이 김밥집이다. 구축 아파트 단지가 빽빽하게 들어선 언덕배기 사거리에 있는 작은 상가에 위치한 이 김밥집은, 웬만해서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있다.
다시마 초절임김밥, 오이장아찌 김밥, 양배추장아찌 김밥이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시그니처 메뉴. 나는 새콤한 걸 좋아해서 처음부터 다시마 초절임김밥의 매력에 빠졌다. 매운 어묵이 알차게 들어가 있는 이 김밥은 한입 베어 물면 오독토독 터지는 새콤한 다시마의 재밌는 식감과,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지만 그래서 맛의 조화를 이루어 내는 야채들로 입안이 즐거워진다. 게다가 사장님이 얼마나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 주시는지, 김밥 한 줄을 다 먹고 나면 기분 좋게 배가 부르다. 서울에서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나는 반드시 이 김밥을 맛집 코스에 넣는다. 반응은 예상한 대로다.
이 동네는 지하철이 없고 버스도 자주 다니질 않아서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아도 오랜 시간이 걸려 번거로울 때가 종종 있다. 게다가 남편이 차를 몰고 출퇴근을 하니, 일상에서 차로 이동을 하려면 택시를 타는 수밖에 없다. 이 김밥집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을 가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버스를 탄다.
굳이 버스를 타고 이 김밥집에 가는 이유는 비단 김밥의 맛 때문만은 아니다. 50대 중반을 넘긴 나이의 수더분한 여자 사장님은 나의 사려 깊은 말동무다. 친구라는 게 꼭 동년배여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나. 같은 나이대의 사람이어도 어쩜 이렇게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반대로, 나이대와 처한 한경은 달라도 자꾸만 더 얘기를 걸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다. 김밥 사장님도 그런 사람이다.
처음에는 얼핏 보면 그다지 친절해 보이지 않은 것 같은 무뚝뚝함이 그녀에게서 풍겼다. 김밥을 싸느라 너무 열중했기 때문이다. 손은 느린데 김밥을 사러 오는 사람이 끊이질 않아, 도무지 손님 응대에 낼 에너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라고 지금의 나는 해석한다.) 이상하게 나는 이 동네에 와서 살고부터 모르는 사람에게도 불쑥 말을 걸고 싶어졌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도 말을 걸었다. 앉아서 김밥 한 줄 먹고 갈 테이블도 한두 개 밖에 없는 작은 공간에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의 서재 때문이었다. 어쩌면 서재라고 말하기에도 거창할 정도로 그마저 아담하고, 정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사장님의 가방이며 노트 같은 잡동사니가 놓인 탁자 정도로 오인할 수도 있을 공간이다. 그러나 나는 그 서재에 놓인 그녀의 책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막상 많이 읽지도 못하면서 남이 읽는 책에는 그렇게나 관심이 가는 이상한 오지랖 덕이라고나 할까.
두 번째 방문을 했을 때에는 서재에 놓인 책이 바뀌었다. 세 번째도 마찬가지었다.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언제부터 내가 그녀에게 읽고 있는 책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는지. 나는 갈 때마다 바뀌는 그녀의 서재에 호기심이 일었고, 빨간 표지의 <수확자>라는 책을 조심스레 들어 질문했다.
"사장님 이거 재밌어요?"
방금 전까지 표정이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이 초여름 복숭아처럼 싱그러워졌다.
"수확자 시리즈 몰라요? 그거 진짜 재밌어요. 한 번 읽으면 밤새서 읽을걸요."
그녀는 닐 셔스터먼이라는 작가의 수확자 시리즈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총 3권의 시리즈가 있는데 이 <수확자>가 1권이라고 했다. 꽤나 섬뜩한 유령 같은 사람이 그려져 있는 <수확자>는 묵직했고 두꺼웠다. 가볍게 훑어보니 문장 자체는 쉽게 읽힐 것 같아 보였다. 도입부부터 빨려 들어가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당장 폰을 들어 책을 검색하고 다음에 볼 책에 찜을 해두었다. 사장님도 이런 대화가 흥미로우셨는지, 이런저런 책 얘기를 해주셨다. 보통 그녀는 소설과 에세이, 시를 위주로 읽는 것 같았다. 최근에도 그녀의 서재에는 시집이 놓여 있었으니까, 분명 그녀는 문학소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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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한다는 관심사 하나로 우리는 금세 작은 우정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작지만 엄연한 우정이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얻어내거나 바라는 목적 없이, 그저 서로가 좋아하는 걸 함께 바라보고 향유하며 즐기는 것, 그게 우정이 아니면 무엇이랴.
나는 다시마김밥을 받아 들고 아쉬운 마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그 뒤로도 종종 나는 잊힐만하면 그녀가 싸주는 김밥을 먹으러 김밥집에 갔다. 그때마다 그녀의 서재에는 같은 책이 놓여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분명 사장님은 책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심지어 내 기억으론 모든 책이 새 책이었던 것으로 보아, 도서관은 거의 이용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진정한 애서가는 책을 빌려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다시금 그 사실을 자각했다. 물론 나는 그녀가 추천해 준 <수확자>는 빌려서 봤다. (애서가가 되려면 한창 멀었나 보다.)
"사장님, 수확자 너무 재밌던데요. 제가 너무 재밌어하니까 남편도 옆에서 보더니 같이 보다가 지금 남편은 벌써 마지막 권 보고 있어요."
내가 재미있게 읽은 책을 추천해 줘 누군가도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을 들으면 기뻐하지 않을 독서가가 있을까. 그녀 역시 그랬다. 사장님은 신나서 또 책 얘기를 이어갔다. 우리가 그간 만나지 않았던 동안 그녀는 쉼 없이 탐독을 해오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자극을 받고, 책을 더 읽고 싶어졌다. 어찌 보면 나는 주로 그녀의 말을 듣고 사장님은 자기가 읽은 책 얘기를 해줬던 것 같다. 그런 시간이 마냥 좋았다. 재밌게 읽은 책 얘기를 한참 듣고 있다 보면 그녀의 세계에 잠깐 들어갔다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뒤로 지독한 병렬 독서 주의자인 나는 <수확자> 시리즈의 2권 <선더헤드>까지 읽다가 다른 책에 눈이 팔려서 중단을 하고 말았는데, 한 번은 사장님이 <수확자> 다 읽었냐고 물어보길래, 아직 읽고 있다고 했다가, 그다음에 또 물어보셔서 중간에 그만두게 됐다고 말씀드렸더니,
"굳이 모든 책을 다 끝까지 읽을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영화로 나온다는데 영화로 봐요." 하셨다.
하루는 갑자기 다시마 김밥이 먹고 싶어 무작정 버스를 타고 무더위를 뚫고 그녀에게 갔다.
그날도 그녀의 서재에는 새로운 책이 놓여있었고, 때마침 가게에는 손님이 없었다.
낯익은 작가의 책과 시집 한두 권이 펼쳐져 있었다. 김정운 교수가 쓴 책이 눈길을 끌었다.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잠시 책을 들어 훑어본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710617
교수직을 정리하고 일본에서 그림을 배우고 온 뒤, 그는 홀연 서울이 아닌 여수로 가서 '자신만의 공간'을 꾸리고 있다는데, 그의 공간은 바로 바닷가 작업실이란다. '인생을 바꾸려면 공간부터 바꿔라!'라는 캐치프레이즈가 흥미롭다. 나도 서울에서 이 바닷마을로 내려와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나만의 공간'을 꾸리고 있으니, 그의 이야기와 지금 나의 생활이 닮아있는 것 같다. 나도 분주한 도시에서 여기저기 떠밀리며 부유했던 삶을 잠시 뒤로 하고 시시각각 색과 모양이 변하는 바다를 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게도 이 바닷마을의 집은 어쩌면 인생을 바꾸고 있는 공간이 아닐까. 그러면서 이렇게 김밥 사장님도 만나고, 그녀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
그날따라 유독 서재에 넓게 펼쳐진 시집의 존재를 뿌리치지 못해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시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녀는 내게 되묻는다.
"시 좋아해요?"
시는 멋지다. 그렇지만 이해하긴 쉽지가 않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감격하며 읽고 싶지만 어렵다. 그래서 나는 시를 좋아해 보려 노력했지만 그게 어렵다고 했다. 그녀는 펼쳐진 시집을 집어 들고 하나하나 천천히 제목을 읽어준다.
"이 시집은 역사적 인물이나 장소를 주제로 쓰였어요. 그래서 읽기가 쉽고 재밌어요."
조금만 읽어보면 재미를 붙여볼 수 있다는 듯 그녀는 신이 나서 말을 잇는다. 그리곤 묻는다.
"여기 생활 어때요?" (그녀는 내가 휴직하고 이곳으로 내려와 살고 있다는 걸 안다.)
"너무 좋아요.. 그런데 앞으로가 걱정이에요. 어떻게 해야 할지.."
난 휴직이 끝난 뒤 어찌해야 할지 아직 계속 고민 중이다. 남편은 학업과 일을 병행하기 위해 이곳에 내려왔지만, 일이 남편에게 너무 잘 맞는 바람에(?) 계획했던 것보다 더 오래 이 도시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상황이다. 남편이 먼저 이곳에서 1년을 살면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월말부부로 살았었다. 그리고 올해는 내가 휴직을 하고 이곳에 내려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편은 서울에서의 내 모습과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고 때때로 놀라곤 한다. 힘들게 들어간 회사였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늘 내적 갈등을 겪으며 회사생활을 했던 터라 지금의 생활이 끝나고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걸 생각하면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안 그래도 바로 전 날, 서울에 계신 부모님과 통화를 하면서 나와 남편의 미래를 너무나도 걱정한 나머지 나를 옥죄는 것 같은 부모님의 우려 섞인 말씀들이 나를 짓눌렀던 터였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어제 있던 일을 털어놓게 됐다.
"진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기도 한데 그것도 확신이 서질 않고.."
"지금 나이면 뭐든 할 수 있어요. 나는 애 둘 키우느라 인생 다 보냈잖아. 다 키우고 나서 이 김밥집 시작한 거예요. 이것저것 알아보고 해 봐요."
물론, 부모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무슨 말이든 응원해 줄 수 있지 않겠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면서도 그녀의 응원은 그날따라 풀이 죽은 내가 생기를 되찾게 하기에 충분했다. 문득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왜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까 자문했다. 우린 종종 대화를 나누지만 그렇다고 절친한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사람이 이렇게 편할까. 마치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이었던 것처럼. 그녀는 나를 나로 봐준다. 나도 그녀를 그녀로 본다. 우리가 대화할 때 우리는 사장님과 손님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아름다운 것에 함께 감탄하고, 좋아하는 걸 함께 좋아한다. 오랜 세월 길어 올린 그녀만의 지혜는 덤으로 얻는다.
글을 계속 쓰고 싶다는 내 말에 그녀는 돈 버는 게 목적이 아니면 그렇게 하라 한다. 오늘 알게 된 사실인데, 사장님은 동아 신춘문예로 등단까지 한 분이었다. 소설을 쓰셨는지 시를 쓰셨는지 말도 안 해주신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나 같으면 동네방네 자랑했을 법도 한데.
김밥을 말고 있는 그녀의 뒤에는 자그마한 직사각형 화이트보드가 있다. 거기엔 파란색 매직팬으로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평범하지 않은)한 김밥집 사장님에게서 어디에나 있는 풀과 같은 행복을 배운다. 그리고 어디에나 있는 김밥이지만 이 김밥집에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있다는 것 역시 느낀다. 먼 훗날 그녀가 말아준 김밥을 떠올리면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벌써부터 그녀가 그립다.
P. S.
이 김밥집은 <전국김밥일주>라는 김밥 책에 소개되어 있다. :)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5055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