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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weller Jul 06. 2024

어두운 밤바다에서 맨발 걷기

파도는 도파민 같다.

바닷마을에 살며 누릴 수 있는 이점 중 하나는 해수욕장에서 모래사장을 거닐며 맨발 걷기를 할 수 있다는 거다. 맨발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이고, 나도 주변에서 여러 번 권유를 받아봤지만 선뜻 시간을 내어 맨발로 바닷가를 걸어볼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엎드리면 코 닿을 데 있는 게 바닷가인데도 맨발 걷기는 뭔가 어르신들의 전유물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특유의 귀차니즘 탓에 그냥 발이 잘 안 떨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이 바닷마을에서 산지 반년이 지나고 조금 안 된 오늘, 처음으로 작정하고 맨발 걷기를 하러 나갔다. 매일이 30도가 넘는 날씨 때문에 해가 지고 나서 나가야겠다는 데에 남편과 합의가 되어 우리는 정말 늦은 시간에 바다로 갔다.


정말 늦긴 했다. 바다에 도착했을 때가 저녁 8시 40분이었으니까. 우리는 일부러 집에서 좀 멀리 있는, 관광객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해수욕장으로 갔다. 집 앞 해수욕장은 이미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서 차들도 많고, 사람도 많고, 번쩍거리는 간판들도 눈이 부시기 때문이다. 늦은 밤바다는 거친 파도로 우리를 맞이해 준다. 주변에는 낮은 산과 얕은 절벽들 뿐이다. 밤바다는 거멓고 맹렬하다. 횟집 간판도 없고, 바글거리는 사람들도 없고, 그저 파도뿐이다. 인적은 드물지만 찐 로컬 사람들은 우리처럼 나와서 맨발로 걷거나 조촐하게 캠핑을 하거나 머리에 랜턴을 쓰고 얕은 물속에서 뭔가를 찾는다. 심지어 기다란 낚싯대를 던져 놓고 물고기를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오른쪽 귓가에서 모기소리의 다섯 배쯤 되는 벌레 소리가 스친다. 이곳은 자연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남편과 나는 신발을 벗고 모래를 밟기 시작한다. 입자가 꽤 거칠다. 발바닥 각질 제거 스크럽 같은 재질이다. 바다 끝에서 모래는 얕은 언덕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만큼 파도가 세고 빠른 것이 아닐까 싶다. 조심조심 물이 닿는 쪽까지 걸어본다. 앗 차가워. 깜짝 놀란다. 7월 밤바다는 얼음물이다. 어디선가 바다의 온도는 3개월 늦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지금 바다는 7월이 아니라 4월 온도인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30도를 뚫고 모래사장을 거닐 생각을 하니 주저하게 된다고 말했던 남편은 나보다 더 호들갑을 떤다. 연신 차갑다는 말만 반복한다. 그런데도 나를 잡은 손은 놓지 않고 기어이 자기가 바다 쪽으로 걷겠다 한다. 나는 혼자 걸어도 괜찮은데. 그렇게 차가우면 안쪽에서 걸어~ 그래도 내가 바다에 빠지면 안 되니 지켜준다나 뭐라나.


파도는 도파민 같다. 자기 맘대로 깊이 들어왔다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얕게 들어온다. 주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세고 깊게 여러 번 들어왔다가 갑자기 멀리서 치고 빠진다. 나는 그런 예측할 수 없는 파도가 좋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른이고 아이고 파도 앞에서 마냥 재미를 느끼는 것 아닐까. 무섭게 달려올 때는 내 영혼의 깊은 곳까지 휩쓸어 갈 것만 같은 위협을 주다가도, 잔잔하게 빠져나갈 땐 그저 한없이 온유하고 차분한 사람 같달까. 일관성 없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두려움과, 일관성이 없어서 생겨나는 묘한 매력을 보는 든달까.


아무튼 나는 7월의 얼음 같은 바닷물이 싫지 않았다. 발목에 물이 닿을 때마다 정신이 번뜩 나면서 온몸이 각성되는 듯한 감각이 즐거웠다. 너무 차가우면 좀 더 모래사장 쪽으로 걸어가면 금세 따뜻해지니까 견딜만했다. 오로지 앞을 보고 걷다가 잠시 끝이 보이지 않는 해안선을 바라보면 아득했다. 이 검은 물속은 얼마나 깊을 것이며, 이 바다는 얼마나 클지. 나는 얼마나 작은지. 그럴 때면 다시 바다 반대편의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올라다 봤다. 그러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여긴 아무래도 해 질 녘에 와야 될 것 같아. 우리는 서로 동의했다. 거친모래를 20여분 걷고 있자니 점점 발바닥에 자극이 더 많이 올라왔다. 보이는 건 눈앞의 이 파도와 모래와 우리 발뿐이니 발바닥의 자극도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그래도 밤에 맨발로 걷는 이 바다 산책이 일종의 모험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우리 여름휴가 온 것 같아. 어디 놀러 온 것 같아. 나는 신나서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남편도 그렇다고 했다.


우리가 다녀간 흔적은 파도가 쓸어가겠지만, 그러니까 또 언제고 새롭게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다겠지. 10월의 바다는 더 따뜻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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