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기록
영빈이가 씽씽카를 타고 나는 영빈이를 따라 벚꽃나무를 향해 race를 했다. “우리 저 하얀 나무까지 race하자” 비니를 쓴 비니는 열심히 달렸다. 추운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벚꽃이 다 펴 있다. 벚꽃나무를 배경으로 비니를 찍어뒀다. 모래가 깔린 놀이터는 참 오랜만이다. 발이 푹푹 들어가는 모래를 밟으며 우리는 메리고라운드(merry-go-round)로 달렸다. 빈이는 팔딱 뛰어 기둥을 잡고 웃는다. 나는 모든 게 계획이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메리고라운드를 돌린다. 점점 속도가 붙고 빈이가 웃는다. 어지러울 것 같은데 괜찮나 보다. 영빈이가 내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Oh hi! 한다. 까르르 웃는 비니. 손은 메리고라운드를 돌리며 일부러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영빈이가 올 때쯤 몰랐다는 듯이 Oh hi! 하면 그게 그렇게나 재밌나 보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영빈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럽다. 메니에르가 도지면 안 되는데.
비니는 서둘러 미끄럼틀로 올라간다. 이 애는 요새 한참 volcano(화산)에 빠져 있다. 매그마가 올라오고 있어!! 빨리 올라와!! 어느새 아까 우리가 타던 메리고라운드는 베수비오 화산이 되어버렸다. 여긴 우리 집이야. 꾸불거리는 플라스틱 미끄럼틀을 가리키며 비니는 웃는다. 내가 먼저 내려갈게. 내려가서 마그마가 ROCK이 됐는지 확인해 줄게. 오래전부터 쌓인 먼지가 굳어 완전히 딱딱해진 알록달록 플라스틱 미끄럼틀을 타고 나는 내려갔다. 왜 하필 꾸불꾸불한 거야 너무 어지럽다. 비니는 그런 나를 보고 웃는다. 빨리 다시 올라와!! 매그마가 또 나오고 있어!! 황급히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기를 반복한다.
우리 이제 시소 타자. 비니가 한쪽에 앉고 나는 다른 쪽에 앉는다. 도무지 한번 내려앉은 엉덩이가 다시 올라가질 않는다. 빈이가 너무 가벼운 탓이다. 동생은 17킬로가 되면 멋있는 장난감을 사주기로 약속했다던데.
나는 우리 이제 그네 타자고 한다. 그네가 꽤 높아서 작은 몸집으로 앉기는 버거워 보인다. 나는 비니를 그네에 태워 비니를 밀어주고 나도 옆에서 그네를 탄다. 아빠가 이렇게 이렇게 다리를 하면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했어. 생각해 보니 나도 어릴 때 혼자 그네를 탈 때면 허공에서 다리로 원을 만들어 더 높이 날아가곤 했다. 어릴 땐 너무나도 당연했던 지식이 어른이 되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잊힌다. 혼자 그네도 탈 줄 안다니. 비니가 많이 크긴 했다.
할머니 집에 돌아와서 우리는 ‘떼었다 붙이는 한국지도 스티커북’을 가지고 놀았다. 비니를 만나러 가기 전에 나는 항상 작은 선물을 사가는데, 이번에는 최근 비니가 관심을 갖는 백두산, 한라산이 그려진 지도가 있길래 그걸 집어 들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비니는 지도를 배경 삼아 북한에 가는 놀이를 한다. 우리 같이 백두산 가자~ 좋아하는 paw patrol에 나오는 pups들을 가져왔다. 야무지게 걔네가 타는 다양한 종류의 차들까지 다 챙겨 왔다. 이젠 이름도 다 외웠다. 소방차 타는 마샬, 경찰차 타는 체이스, 비행기 타는 스카이(내가 일부러 맨날 ‘케이티’라고 이름을 까먹은 것처럼 부르면 비니는 나를 보며 웃는다. "스카이 잖아"), 잠수함 타는 주마, 공사차 타는 러블까지. “근데 우리는 북한에 갈 수가 없어 영빈아. 우리는 남한에 있잖아.” 갑자기 슬퍼졌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 펍스들은 미국애들이잖아! 그러니까 북한에 갈 수 있을 거야! 비니는 갑자기 신났다. 그리고 한마디 거들었다. “We can go under the ground.” 그래. 우리 상상력으로는 못할 게 뭐가 있겠어. 우리는 pups들을 데리고 백두산에 갔다.
비니는 아직 5세 어린이라 역할극을 상당히 좋아한다. 어쩌다 보니 역할극에 능한 이모가 된 나는 영빈이의 최애 놀이친구다. 진심으로 나를 자기 친구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놀이터에서도 “이제 너가 이렇게 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한다. 지도 스티커북에는 각 지역의 명물, 이를테면 제주 한라봉이라든지 고창 수박 같은 음식 스티커가 많이 있었다. “비니야, North Korea에 사는 사람들은 dictator가 있어서 우리처럼 먹을 게 많지가 않아. 우리가 pup들이랑 같이 가서 사람들 먹을 거 주고 오자” 했더니, 비니는 갑자기 생긴 새로운 역할놀이에 신이 난다. 마치 서클렌즈를 낀 것 같은 크고 동그랗고 까만 비니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난다. 우리는 underground로, 혹은 헬리콥터로 North Korea에 갔다. 비니는 북한 지도에 그려진 빌딩마다 하나하나 들러서 춘천 닭갈비, 천안 호두, 금산 인삼 같은 것들을 북한 사람들한테 나눠줬다. 비니는 “백두산도 폭발하는 거야?”, “한라산은 무슨 화산이야?” 같은 질문을 한다. 나는 비니한테 “나중에 우리 백두산에 같이 가자”라고 했다. 비니는 좋은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자고 한다. (생각해보니 비니는 Korean-American이니 북한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이런 놀이를 하고 보니, 이렇게나 가까운데 너무도 먼 북한의 존재가 새삼 신기하게 다가온다. 어린 조카에게는 더욱 이상한 수수께끼 같을지도.
하얀 나무가 활짝 피어 있는 오늘 같은 오후가 비니 삶에, 그리고 내 삶에 따뜻한 장면으로 오래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