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흘려야만 비로소 깨닫게 되는 일

교보문고 예찬을 겸해

by Mindweller

4월인데도 손이 시려 패딩을 입고 출근한 오늘, 부서 점심을 거하게 먹고 새로 생긴 카페에서 부장님이 커피를 사주셨다. 사장 공청회로 회사는 부쩍 소란스러웠고, 그래서인지 점심모임은 평소보다 빠르게 해산하는 분위기였다. 점심에 잠시 시간이 날 때마다 습관처럼 교보문고에 내려간다. 나는 잠깐 시간을 내어 회사 지하에 있는 교보문고에 들렀다. 마침 같이 식사했던 동료 몇 명도 교보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예기치 못하게 반가운 이들을 만날 때면 작은 기쁨이 피어오른다. 동료 한 명은 교보문고에서 하는 책 추천 이벤트에 당첨됐다고 신이 나서 자기 이름이 새겨진 볼펜을 보여준다. 우와 너무 신기해요. 나도 이거 해야지. 그랬더니 그녀는 말한다. 제가 이거 두 번이나 추첨해서 두 번 다 당첨이 돼봤는데요. <철로 된 강물처럼> 같은 책 쓰시면 안 되고 이 매장에서 많이 팔 것 같은 책으로 하셔야 돼요. (최근 내가 읽고 너무 좋아서 추천해 준 소설인데, 내가 그 책을 추천할까 봐 걱정이 됐나 보다.) 역시, 책 추천에도 공급자(=나) 마인드가 아니라 소비자(=교보) 마인드가 중요한가 보다.


우리는 갑자기 신이 나서 이 지점에서 밀고 있는 책이 뭘까 두리번두리번했다. 우리는 새로 나온 <파과>의 표지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궁시렁거렸고, 달러구트 꿈백화점의 200만 부 기념 합본호의 책배가 환상적인 그림으로 꾸며진 걸 보며 한참을 감탄하기도 했다. 거의 10년 전에 읽었던 양귀자의 <모순>이 이제야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게 신기하다는 말도.

달러구트 꿈백화점의 아름다운 책배


어느덧 우리는 이 지점에서 소위 ‘밀고 있는’ 책코너에 당도했다. 확실히 낯선 책이 많았다. 동료는 김소연 작가의 <마음사전>을 보고는, 이 책은 사서 읽기보다 그냥 여기서 후루룩 읽는 게 낫다고 했다. 예전에 저한테 말해줬던 책 아니에요? 오 맞아요. 나는 정신없이 책을 들춰봤다. 옆에 뒀던 내 디카페인 콜드브루가 엎어진 줄도 모른 채. 이미 엎질러진 커피는 되담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야속하게도 커피물은 쌓아놓은 온갖 책에 여기저기 퍼져만 갔다. 이를 어째. 당황한 나는 휴지를 찾았다. 동료가 직원을 가리켰다. 나는 불편한 마음을 가득 안고 책정리에 분주한 여자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휴지 있으세요? 아 저희가 물티슈만 있는데요..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나는 방금 일어난 일을 그녀에게 이실직고했다. 사실 제가 책에 커피를 흘렸어요. 그녀는 황급히 어디에 흘렸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흥건한 커피물의 현장에 왔다. 아 제가 다 처리할게요. 괜찮아요. 그녀는 말했다. 교보문고의 초대 회장은 가난한 사람도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경영방침 아래 모두 책방에 와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서점을 구상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거 제가 물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무슨 처리를 하면 되지만 내가 할 건 없고 그냥 가면 된다고 했다. 아마 재고를 조정해야 한다는 말인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방금 일어난 이 사건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교보 창립자가 누구나 책을 읽게 해 줘야 된다고 했대잖아요. 그래서 낙서 같은 거 해도 뭐라고 안 한다는 말 들었어요. 동료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명백히 잘못한 이 일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질 않았다.


내가 흘린 커피에 종이가 물들었을 책은 적어도 다섯 권은 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내가 관심도 없는 주제였다.) 그런데도 배상의 책임이 없다니. 그 순간 나는 교보를 더욱 사랑하게 됐다. 너무 일이 힘들 때 잠깐 내려와 서점을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활력을 주곤 했던 이 교보라는 공간이 더욱 소중해진 것이다.


내가 커피를 흘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커피는 엎질러졌지만, 엎질러졌기 때문에 이날 오후는 뜻밖의 따뜻함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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