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덕트 오너(PO)의 핏(Fit)을 본다고 한다.
나는 기획팀에 속해있다. 제법 최근까지 기획자로 살아왔고 현재는 기획자들의 리소스 관리와 이해관계자 협의, 우선순위 결정 등 다양한 서비스를 매니징을 하는 역할로 살고 있다. 최근 들어 유명한 스타트업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생겼었는데 프로덕트, 핏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쓰더라.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직무(PO)에 Fit이 맞는 사람을 채용 중에 있다고 했다.
스타트업에서 이야기하는 프로덕트는 뭐고 핏은 대체 뭘까. 나같이 오래된 IT회사(씁쓸하구먼...)에서 매트릭스 조직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이 두 단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스타트업, 그중에도 특히 PO에 관심 있는 기획자라면 눈여겨보시라! 회사마다 정의하는 기준들이 달라서 의미가 조금씩 다를 수도 있는데 뭐, 그거슨 알아서 판단하시라!
비교적 최근까지 IT회사에서는 '프로덕트'라는 말보다 '프로젝트'라는 말을 많이 써왔다. 주로 가상공간의 서비스를 다루기에 프로덕트라는 말이 그리 적합한 단어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실물이 있는 유통회사는 '제품 기획'이라는 역할로 실제 프로덕트를 위해 고민하는 직무가 별도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로봇청소기를 출시한다고 가정하면, 시장 상황은 어떤지 경쟁사는 어디이고 어떤 차별성을 둬야 하는지 등 제품에 대한 연속적인 고민과 문제를 해결한다. 뿐만 아니라 출시 후 고객들은 기대하는 바와 같은지 리뷰 등을 확인하며 모니터링까지 꼼꼼하게 체크하고 보완할 것은 없는지를 주기적으로 체크하는 일을 한다.
IT회사는 그럼 무엇을 프로덕트라 부를까? 앞선 예시와 유사하다. 회사마다 차이는 좀 있겠지만 'IT회사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제품으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싶다. 즉, 네이버라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네이버(검색 포털)'나 카카오 회사에서 제공하는 '카카오톡'과 같이 손에 잡히는 실물제품은 아니지만 이런 무형의 서비스들이 프로덕트(제품)가 되는 것이다. 이런 개념이 확립되기 전까지 우리는 '서비스'라 칭했고 이 무형의 제품을 '프로젝트' 단위로 고도화를 해갔기에 PM의 개념도 프로덕트보다는 프로젝트 매니저가 상대적으로 익숙했던 것 같다.
IT회사에서는 프로덕트를 담당하는 조직을 대체로 기획, 개발, 디자인처럼 직군으로 쪼개기도 하고 제작, 운영과 같이 업무의 유형으로 쪼개기도 한다. 그리고 요즘 많이 차용되는 애자일을 지향하는 회사는 직무, 직군 무관하게 하나의 프로덕트를 맡아서 그들이 알아서 책임지고 가꿔나간다. 이런 방식의 업무 스타일은 스타트업을 기점으로 점점 확산되고 있다. 물론 회사마다 관리되는 업무 스타일이 다르기에 아직은 회사마다 자신들의 프로덕트 관리에 알맞은 조직으로 세팅하여 운용하고 있다.
내가 현재 속한 회사는 공식적으로 직군(기획팀, 개발팀 등 직무단위)으로 팀이 쪼개져있지만 실제로 일을 하는 스타일은 프로덕트(서비스) 단위로 인력이 뭉쳐서 일을 해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기획자가 몇몇의 개발, 디자이너와 골을 달성하기 위해 대부분의 영역을 관여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앞서 말한 애자일 방식의 조직도 유사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직 모든 의사 결정권이 별도의 최상위 결정권자에게 있다. 실무자에게는 결정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완전한 애자일 방식으로 일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고, 업무의 스타일만 애자일 방식과 일부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이런 애자일한 업무방식을 추구하는 조직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PO다. 왜 필요할까? 빠르게 결정해야 될게 많거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다. 배가 바다로 가서 제대로 항해를 할 수 있게 잘게 나눈 미션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사공들을 설득해서 바다로 끌고 갈 수 있도록 일러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우리 회사는 기획자가 어느 정도 그 역할을 하고 있고 안타깝게도 이런 사유로 업무강도가 센 편이다. 누군가는 이 또한 내가 할 일이라고 즐기며 일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매번 이것까지 해야 하냐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여기에서 핏(Fit)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핏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가장 흔해빠지게 들을 수 있는 상황은 옷을 착용할 때인 것 같다. '내가 청바지 핏은 좀 괜찮은 것 같아' 라던가 '이건 핏이 좀 구린데' 라던가 하는 소리를 들어봤을 거다. 그렇다. 옷이 내 몸에 잘 맞는지 보는 것처럼 회사에서는 '우리 회사에 잘 맞는 인재인지'를 보기 위해 컬처 핏을 본다. 주로 부여받는 미션을 R&R 체제하에 일을 하던 일반적인 회사에 있던 사람들이 스타트업으로 넘어왔을 때 해당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핏이 잘 맞는지) 즉, 업무 적합도를 체크하는 용어로 쓰인다.
스타트업은 왜 PO형태로 기획자를 채용할까. 빠르게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빠른 성장을 위해서는 하나하나 가르쳐 성장시키기보다 소위 '짬바'로도 판단이 수월하여 빠르게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결정권이라는 단어가 매력적으로 들려서인지 PO를 희망하는 기획자가 주변에 많다. 그리고 기획을 오래 했으니 나 정도면 PO 할 수 있는 거 아냐?라고 생각한다. 뭐, 내가 스타트업 업계인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스스로 원하면' 할 수 있다고 본다. 못하는 게 어딨나! 하면 하는 거지. 업계에서 유명한 문장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개발 못하는 게 어디 있어,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같은 논리다. 못할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분명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기획자와 PO의 차이는 기존 글들에도 적었지만 분명하게 있다. 완전한 이해가 될지 모르겠지만 예를 한 번 들어 보자. 집을 이끄는 가장과 집안을 책임지는 주부가 있다. 집에 청소기가 고장이 났다. 집안의 청결과 안정을 책임져주는 주부는 청소기가 없을 때 불편한 것들을 어필한다. 언제까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러면 가장은 접수를 받고 우리 집의 구조를 떠올려 적합한 청소기를 탐색해서 구매한다. 그리고 주부에게 괜찮은지 평가를 듣고 '쓸만하네'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안심한다.
그러나 만약 가장이 집안의 도면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청소기 사양을 다 따져보고 리스트업을 한 뒤 가장 기능도 많고 유명한 것을 사 왔다 치자. 아마도 '비싼 쓰레기를 사 왔네'라는 혹평을 받을 수 있다. 설령 제대로 사 왔다 하더라도 어떻게 쓰는 건지 가장은 설명서를 보기 전까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주부는 짬바로 조금만 훑어보면 기존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쉽게 인지하고 조립해서 바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함께 온 미니 툴을 사용해 집안 곳곳의 먼지들을 능수능란하게 빨아들인다. 가장은 주부의 디테일을 때려 죽어도 따라잡을 수 없다.
조금 추상적이긴 하지만 이 예시에서 도면과 비용을 파악하고 청소기를 픽하는 가장은 PO고 청소를 못하는 리스크 판단과 경험에 의한 청소기 사용성을 알고 있는 주부는 기획자(또는 운영자)다. 기획자는 미션이 떨어졌을 때 심도 있게 고민하고 리스크를 판단하며 세심하게 서비스를 설계하는 전문가다. 이런 깊은 관여가 축적되면 경험과 노하우가 되는 것이고, 이슈가 발생하더라도 이 경험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문제의 원인을 예측하고 해결할 수 있다. 그만큼 서비스에 대해 깊고 뾰족하게 관여하는 전문 영역이다.
반면 PO에게는 실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깊고 섬세한 설계보다는 나아가는 방향 설정이 더 중요하다. 기획자에 비하면 넓고 얕게 관여해야 한다. 지나치게 깊게 관여하는 순간 방향성을 잃은 배가 숲으로 갈 수 있기 때문. 목표하는 방향 안에서 부여된 미션을 정리하고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고객의 소리부터 회사 내부의 소리까지 광범위하게 듣고 교통정리해가는 일을 한다. 내 프로덕트만큼은 누구보다 상황에 대한 인지가 빨라야 하고 귀찮고 잡다한 것도 마다하지 않고 해내야 한다. 내 회사 아닌데, 내 회사처럼 일해야 된다. PO가 미니 CEO라고 불리는 이유다.
PO가 기획자와 일부 비슷한 업무성격을 지녀서 그런지 같은 업무로 인지될 때가 간혹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 조금이라도 기획자로 살았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통정리를 위해서 가져야 하는 지식이나 해야 할 과업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유관부서의 이해(디자인, 개발 등)는 당연하고 상위 결정 관리자의 방향을 잘 싱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각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눈치도 중요하고 업계에 대한 인사이트도 필요하다. 상세한 화면 설계에 깊게 관여하는 욕심을 부려서도 안된다. 그 관여에 시야가 고정되어버리면 방향성을 잃을 수 있다.
때문에 PO는 기획을 오래 했다고 해서 무조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핏이 정말 맞아야 한다.(내 입에서 이 말이 나올 줄은 몰랐네...) 명확한 R&R하에 기획에 집중하는 것을 더 효율이 난다고 느끼고 산출물의 퍼포먼스가 더 잘 나는 사람이라면 PO역할은 핏에 알맞지 않다. 하나의 뾰족한 기획 전문성을 갖고 싶은 사람도 맞지 않을 확률이 높다. 만약 한 번이라도 '기획자가 이 것까지 해야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PO직무는 매-우 피곤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 직무는 진정 성향이 맞아야 할 수 있는 일이고, 본인이 여러 사람한테 치이는 것이, 다양한 일이 한 번에 쏟아지는 것이 힘들고 고되고 피로를 유발하는 일이라면 애초에 마음먹지 않는 것이 좋다. 그래서 본인이 '원하면' 할 수 있는 직무라고 이야기한 것.
이렇게 얘기해놓고 보니 내가 PO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공식 직무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하는 일의 유사성으로 봤을 때 - 쿠팡의 PO가 쓴 책이나 스타트업의 PO 채용정보 내 JD를 보면 - 사용하는 도구와 언어가 다를 뿐, 일의 행위는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직무로 할당받지 않았어도 느낌을 알 것 같다. 그냥 그 일을 나는 이미 하고 있다. 그렇기에 기획자로 일할 때와 현재의 차이가 명확히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어느 역할을 부여받았을 때 나는 더 즐겁고 행복한가.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혹시나 이직을 계획하고 있다면 스스로 돌이켜보자. 나는 기획자 or PO 중 어느 것이 더 알맞은지, 어떤 핏이 더 어울리는지 말이다. 이런 용어를 나만 모르는 거 같고 모호해서 헷갈리고 스타트업은 가고 싶고 하는 기획자들이 참 많을 거다. 용어가 생소해도 두려워말자. 좀 무책임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그냥 가서 하면 하게 된다. 물론 주니어들은 연관 지식, 업계의 이해와 같은 내공이 어느 정도 쌓여야 업무 선택이 수월할 거다. 그러나 이 또한 두려워 말자. 기획자에게 의지만 있다면 어떤 직무가 떨어져도 못할 것은 없다.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현재 스타트업에 다니는 따끈한(?) 상황도 아니고 업무의 유사성이 있을 뿐 완전한 애자일을 겪지 못해서 내 설명이 사실 완벽히 맞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다. 허나, 따지고 보면 회사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조금씩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책임감 있게 본인이 맡은 일을 '되게' 하면 된다. 직무명 뭣이 그리 중헌가. 당신이 PO든 기획자든, 자신의 자리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기를 바란다.
오늘은 월요일이니까. 해피먼데이! (아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