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보다 해몽
비교적 가까운 과거부터 '우리는 데이터로 일을 한다'는 회사의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데이터를 활용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누군가 한 명의 의견에 목숨 걸지 않고(보통 싸장님) 명확하고 객관적인 숫자가 알려주는 가설! 참 좋다. 그리고 꽤 많은 후배들이 '데이터'라는 단어에 이끌려 회사(특히 스타트업)를 선택한다. 생각해볼 문제였다. 데이터로 일을 한다는 것. 정말 데이터는 꼭 맞는 정답을 알려줄까.
딥러닝을 통한 큐레이션을 위해 필요한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한 뒤 그 지표를 근거 삼아 개인화 알고리즘에 접목시킨다고 한다. 말부터 어렵다. 뭔 소리야?
이런 조직에는 대부분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데이터 애널리스트 등 다소 생소한 직군들이 존재한다. 이름부터 어려워서 그런가 꽤 스마트해 보이고 멋져 보인다. 나 역시 그렇게 일하는 조직과 집단에 대한 동경도 있다. - 물론, 실체는 아닐지라도 - 추상적이고 두리뭉실한 가설들을 정량적인 지표로 확인하고 그것을 토대로 반영하는 일. 프로덕트를 맡은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주로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서비스를 책임지는 사람들은 주 업무가 '설득'인데 객관성을 띄는 서비스 관련 지표가 있다면, 그리고 지표가 특정 목표치를 예측할 수 있고 그것이 시각적으로 표현된다면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비교적 큰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된다. 뻔히 보이는 미래를 그림 하나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얼마나 편하게요?
데이터는 인간의 사고와 논리를 입증할 수 있는, 그리고 인간의 눈으로 식별 가능한 유일한 언어다. '내가 생각할 때는 이게 맞다'와 같이 터무니없는 꼰대 언저리쯤 누군가의 그 생각을 유일하게 처참하게 짓밟아줄 수 있는 도구인 셈이다. 그래서 나도 데이터를 보고 판단하는 것을 좋아한다. 데이터만큼 설득력 있는 친구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데이터로 일하는 조직은 항상 옳은 답을 내놓을까? 데이터로 인해 빠질 수 있는 오류는 없을까? 그럴 리가. 당연히 있다. 데이터 분석으로 보면 A가 답인데 반해 예상하지 못하게 B의 대안이 답인 경우가 있다. 뭔가를 놓쳤다. 데이터상 당연하게 A가 결과로 도출되어야 하는데,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 또 다른 한 가지가 존재한다. 데이터와 함께 심도 있게 들여다보고 믹스해야 하는 재료, 그것을 나는 '감각'이라고 하겠다.
감각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축복받은 인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크게 상심하지 않아도 된다. 회사를 다니는 회사원에게 필요한 감각 정도는 충분한 직무 경험에서 획득할 수 있다. 즉, 많은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던 어느 부분의 감각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관심을 쏟아야 하지만 말이다.
감각은 식물과도 같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주고 주변 환경을 가꾸며 키워나가야 한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다 보면 어느 순간 향긋한 꽃이 피게 된다.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자양분이 되어 어렵사리 피어난 꽃을 나는 '인사이트'라 칭하겠다. 데이터와 같은 정량적 수치와 힘들게 맺은 인사이트가 만나면 한쪽으로만 치우쳐 세운 가설보다 좋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높다.
물론 데이터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원하는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 솔직히 개인의 감각과 경험 위주로 일하는 경우보다 데이터를 보고 일하는 게 훨씬 설득되고 일처리도 나이스 하다. 그럼에도 감각 한 방울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데이터가 보여주는 그럴듯한 그림에 속아 더 나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았으면 하는 거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데이터로 일한다는 집단에서도 감각으로 얻은 인사이트가 있는 인재 즉, 경험이 많은 사람을 뽑으려 애를 쓴다. 데이터를 보고 식별하고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방법론의 학습으로 가능하지만, 감각은 시간과 관심을 들여 스스로가 맺어야 하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 열매가 쉽게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일 잘하는 회사들은 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사이트라는 녀석이 추상적이고 모호하고 눈에 잡히지 않는 비언어적인 요소이다 보니 무시당하는 경우도 적잖다. 식별이 가능하려면 스스로가 검증해내야 되는데, 누군가 증명해주는 것도 아니고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인사이트인지 그저 짬바로 대충 때려 맞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데이터를 중심으로 일한다'는 회사를 준비하고 있다면 회사에서 데이터 기반으로 사고하고 판단했던 경험을 어필하면서 내 인사이트가 어떻게 발현되었는지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좋겠다. 특정 통계치를 보면서 고도화를 했던 경험이나 A/B테스팅을 통해 사용자의 선택을 경험했던 것도 좋다. 어떤 경험이든 '데이터만으로' 업무를 한 것보다는 MSG가 첨가되어도 좋으니 자신의 인사이트 한 방울에 대한 어필을 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
참고로 데이터로 일한다고 알려진 일부 회사들이 꼭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주진 않는다. 그런 회사로 알려진 버티컬 커머스를 조금 깊게 마주한 경험이 있다. 워낙 유명한 회사라 기대를 했지만, 유저로 맞아하기에 터무니없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술적으로 어떤 정량적 수치를 다루는지는 외부인이라 잘 모르겠지만 앞서 말했던 '인사이트'가 아직 발현되지 않은 것 같다. 버티컬 서비스이기에 특정 분야만큼은 기술적으로 뛰어난 정량적 데이터는 충분할 것으로 생각된다. 혹시, 누군가 이런 회사에 가게 된다면 사용자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서비스를 더 견고하게 설계해주기를 바란다.
데이터는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고마운 지표다. 그렇기에 잘 활용한다면 확실히 좋은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백날 데이터만 들여다본다고 사용자를 이해할 수는 없다. 데이터는 도구이고 근거이지, 데이터가 읽어주는 흐름만을 신뢰하고 서비스를 가꿔나가면 위험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맞고 틀리고는 데이터가 결정하는 것도 기획자가 또는 PO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사용자에게 그 답은 있고, 우리는 그동안 사용자들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래야 데이터도 의미 있게 발현될 수 있다.
그렇기에 '데이터로 일한다'는 것이 '데이터를 보고 우리의 인사이트로 가설을 세워보자'가 되어야지 데이터가 알려주는 대로 답을 결정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주어진 데이터를 보고 한 명의 해석만으로 정답을 찾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데이터는 누구나 해석 가능하도록 생산해야 하고, 그 해석은 해석자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다. 꿈보다 해몽이다. 데이터가 알려주는 지표의 방향이 무조건적으로 하나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기에 한 명의 데이터 해석을 무조건 신뢰하는 것은 위험하다.
데이터는 분명 좋은 답을 발굴하고 판단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재료임에는 틀림없다.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재료다. 그렇기에 공들여 생산하고 제대로 사용돼야 한다. 무조건적인 데이터의 맹신이 서비스 품질을 저해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기획자들은 어떤 데이터가 의미가 있을지 깊게 고민하고 공들여 쌓은 데이터를 다양하게 해석해서 가설을 세우는 연습을 치열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연습들이 내가 맡은 서비스의 성장을 도모하는 초석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꾸준한 연습을 통한 다각화된 데이터의 해석과 열심히 가꿔 맺은 인사이트를 한 방울 담아 고객들의 생각을 보다 잘 읽어내는 기획자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