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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치녀다

김치 애호가의 김치 예찬

by 달하
김치(kimchi)
소금에 절인 배추나 무 따위를 고춧가루, 파, 마늘 따위의 양념에 버무린 뒤 발효를 시킨 음식. 재료와 조리 방법에 따라 많은 종류가 있다. - 네이버 국어사전


김치녀로 불리던 시절

어릴 때부터 누군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 물으면 '김치'라고 대답을 해왔더랬다. 흰쌀밥에 김치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된다. 매콤 칼칼한 김치를 한 입 아삭하게 물면 이유 모르게 느끼했던 속을 정화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친구들은 어릴 때 나를 '김치녀'라고 불렀다. 지금은 뜻이 너무 달라져서 사용할 수 없는 단어가 됐지만 나의 체내에 쌓인 나트륨 수치는 그동안 먹어치운 김치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술집이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김치를 찾으면 '어이구, 저저.. 김치녀 또 납셨네'라면서 혀를 내두른다.


아직도 술자리에서 회자되는 내가 김치녀로 불리게 된 일화가 있다. 고등학생 때 친구와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토끼고 칼국수를 먹으러 갔는데 거기에 나오는 작은 항아리에 담긴 김치를 혼자 2통을 먹었다. 칼국수가 나오기 전 이미 1통을 비우고 칼국수가 나오고 나서 추가로 1통을 먹어치웠다. 친구들이 그때부터 나를 김치녀로 부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김치, 인류 최고의 음식

김치가 곁들여지면 감칠맛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궁합 좋은 음식들이 있다. 뜨끈한 감자, 고구마에는 생김치가 잘 어울리고 편의점에서 사 먹는 얇고 가벼운 컵라면에는 볶음김치가 참 잘 어울린다. 곱디 고운 뽀얀 국물의 설렁탕에는 깍두기가 제맛이고 순대국에는 갓 만들어낸 겉절이가 딱이다. 인류 최고의 발명으로 불리는 라면에도 김치가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다.


김치 요리는 술과도 참 어울린다. 비 오는 날의 바삭한 김치전과 막걸리는 고유명사처럼 자리 잡고 있다. 제육과 김치를 볶은 뒤 고소한 두부와 함께 먹는 두부김치는 소주가 잘 어울린다. 얼마 전 묵은지 감자탕을 먹었는데 소주도 잘 어울리지만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 그렇게 어울리더라. 그 어떤 상황에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역시, 인류가 발견한 최고의 음식이다.


고모는 신김치를 이용해 메밀전병을 해준다.

김치가 더해지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음식들도 있다. 메밀전병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사실 전병이라는 이름 그 어디에도 '김치'라는 단어가 없지만 김치가 주 맛이 되는 요리다. 우리 고모가 직접 만든 전병이 정말 맛있기로 소문나 있는데 주로 새콤하게 무른 신김치를 넣어 사용하고, 일반 음식점에서는 고기와 김치를 버무려 사용하는 것 같다. 조연이 주인공보다 빛난 격이다.


과거에는 김치가 단독으로 사용되거나 약간씩의 조합만으로 사용됐지만 요새는 김치를 주재료로 활용한 훌륭한 요리들이 많아져서 너무 좋다. 김치와 치즈가 안에 듬뿍 들어간 김치치즈 롤가스라던지 김치 스파게티와 같이 새로운 조합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렇게 희망했던 김치 맛 과자도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참 살기 좋은 세상이다.



김치 대량생산의 시기, 김장철

뜻밖의 가족 공개

김치사랑으로 유명한 우리 집안은 김치와 곁들이는 다양한 음식들을 해 먹는 것을 좋아한다. 때문에 김장철이 큰 가족행사기간 중 하나다. 김치 대량생산 공장을 방불케 하는 장면이 연출되는 김장철에는 적게는 50포기, 평균적으로 100포기 정도씩은 하는 것 같다. 앞선 글에서 확인했다시피 8남매가 나눠먹기 위해서는 대량생산은 불가피하다.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김장이 반 정도 끝나 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알싸한 고춧가루 향이 코와 눈을 찡하게 한다. 우리 가족은 김치에 설탕 대신 매실액을 넣고 사과를 갈아서 넣는다. 우리 집 김치는 코를 찌르는 매콤함보다 조금 부드러운 매콤함을 전달하는데 아마 매실과 사과가 그 역할을 해주는 게 아닌가 싶다. 직접 다진 마늘과 짭짤한 액젓까지 더한 뒤 쨍한 빨간색의 고춧가루를 여러 번 빙빙 두르고 핑크 고무장갑으로 한 손 크게 버무리며 김치를 완성해간다.


김장철에는 보쌈이지

김장철에는 삼겹살 파티만큼은 아니어도 김장하는 무리 옆에서 소규모 파티가 열린다. 몇 시간 동안 푸욱 삶아낸 뜨끈한 수육에 빨간 고춧가루로 물들기 전 짭조름하게 간이 밴 배추, 김치 속에 쏙 들어가 맛을 물들여줄 무생채 3종 세트가 준비되어있기 때문. 생생하고 싱싱한 특별 손님 굴까지 배추에 한데 싸서 입에 넣으면 그 맛은 꿀맛이다.



엄마의 김치요리

그렇게 규모의 경제로 얻어진 김치들은 새로운 요리로 변신을 꾀한다. 우리 엄마는 워낙 손맛이 좋아서 김치를 활용한 다양한 요리들을 해주는데 한 번도 만족스럽지 못했던 게 없는 것 같다. 빨갛고 강렬하게 무쳐진 김치를 그대로 볶거나 지지는 요리가 있는가 하면, 일부러 고춧가루를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낸 뒤 하는 김치 요리도 있다.


특히 맛있는 엄마의 김치찌개는 전매특허를 내도 될 정도로 독보적이다. 그 어떤 체인점이나 맛집에서도 엄마 김치찌개보다 맛있는 찌개는 못 본 것 같다. 때문에 그 어떤 음식과 어울려 먹어도 맛이 일품이다. 어릴 때 오빠와 자주 먹었던 간식(?)으로 김치찌개와의 식빵의 조합이 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보고 윽- 소리를 냈지만 나와 오빠는 그게 왜 이상한 조합이라고 생각하는지 진심으로 몰랐다. 성인이 되고 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식빵과 김치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는 걸 알게 됐을 뿐, 여전히 식빵에 엄마의 김치찌개는 맛있다.


엄마가 카톡으로 보내준 '가볍게' 담근 김치들

엄마는 김장철이 아닌 평소에도 가볍게(?) 김치를 담근다. 먹는 음식에 알맞은 김치가 항시 준비되어있어야 된다는 강박이 있는 엄마는 으썩하게 씹어낼 수 있는 무를 활용한 김치 하나, 가볍게 꺼내먹기 좋은 배추김치 하나, 오이를 활용한 소박이나 오이지무침과 같은 김치 하나 정도는 준비를 해놔야 마음이 놓이나 보다. 나의 김치사랑은 엄마의 주입식 교육으로부터 비롯됐나 싶기도 하다.


배달음식을 먹더라도 엄마의 김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피자나 치킨을 먹을 때에는 아삭한 오이소박이나 생김치는 필수다. 둘 다 없는 날에는 무생채를 꺼내오거나 나의 최애 김치인 물컹 아삭한 노각무침을 꺼내먹는다. 매콤한 닭발이나 오돌뼈와 같은 야식을 시키는 날에는 새콤 시원한 동치미나 백김치가 조금 더 잘 어울린다.


사진만 봐도 침 고이는 김치말이 국수

입맛이 없어지는 더운 여름이나 이벤트 음식이 필요한 날이 되면 엄마는 김치말이 국수를 해준다. 시원한 김치냉장고에서 갓 꺼낸 김치 국물에 물을 살짝 더하고 한 그릇 넘쳐흐를 정도로 가득 차게 국수를 넣은 뒤 고모가 직접 짜낸 고소한 참기름 몇 방울이면 완성. 여기에 가끔 오이와 삶은 계란을 얹어주기도 한다. 집 나간 입맛도 되돌아온다는 마성의 엄마표 김치말이 국수.



행방이 묘연한 '김치이빨'의 유래

사실 김치와 관련된 글을 쓰게 된 데는 목적이 하나 있다. 꼭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는 배추꼬랑이 - 배추 뿌리, 김치 꼬다리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것 - 를 '김치이빨'이라고 부른다. 얼마 전 명절에 삼겹살을 구워 먹고 "엄마 김치이빨 어디다 버려?" 했더니 엄마가 그게 뭐냐고 묻는 거다. 옆에서 새언니가 "너도 이빨이라고 하네. 그거 어디서 나온 말이야?"라고 묻는데 전혀 모르겠다. 난 원래 김치 꼬다리를 김치이빨이라 불러왔다.


친오빠 역시 그랬다. 그 날 우리 둘의 기억의 조합으로는 분명 출처가 엄마인데 엄마는 그날 처음 듣는 단어란다. 오빠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고 까르르 거렸지만, 정말이지 둘 다 어디서 들었는지 그 유래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네이버에 검색을 했는데도 우리처럼 부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혹시 이 글을 보는 김치 애호가 중 '김치이빨'이라는 단어를 들어 봤거나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지 꼭 찾고 싶다. 김치이빨의 유래를 아시는 분이 계시면 댓글을 달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래가 너무 궁금해요!



오늘도 김-치

친구의 권유로 인해 가볍게 김치에 대한 이야기를 쭉 써내려 봤는데 참 즐거웠고 배가 고파진다. 내 주변인이라면 대부분이 아는 나의 애틋한 김치사랑이 잘 전달됐는지 모르겠다. 내 면역력의 80% 이상은 아마도 그동안 먹어낸 김치 덕분이 아닐까 싶다. 나는 과거에도 그랬고 여전히 김치녀 - 김치를 사랑하는 여자 - 다.


이토록 맛있고 혁명적인 우리의 전통 음식 김치가 오래오래 살아남는 음식이 되길, 한국을 넘어서 모든 전 세계인들이 이 진정한 맛을 알게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오늘도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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