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참고:
예비 또는 초급 기획자를 위한 글입니다.
나는 왜 기획자라는 주제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는가. 우선 이 업계의 기획자가 하는 일을 소개하고 싶었고 나아가 기획자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어떤 것들을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지, 어떤 마음가짐이 중요한지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물론, 현직 기획자들이 모두 나와 같지 않을 것이고 경험한 바가 모두 다를 것이기 때문에 기획자로의 발돋움에 참고 글 정도로 가벼이 봐주면 좋겠다.
또한, 앞으로 이 매거진에 쓰는 대부분의 글은 가능하면 알아듣기 쉬운 용어들을 기반으로 쓰게 될 것이다. 어려운 용어를 쓰게 된다면 누가 봐도 이해가 가능한 수준으로 쉽게 풀어서 쓸 것이다. 때문에 실제 현업에서는 더 복잡하고 깊은 것일지라도 이 매거진에서는 상당히 단순화해서 쓴다는 것을 염두하고 읽어주길 바란다.
앞선 글에서 IT회사에서 하는 전반적인 일과 직군에 대해 간략히 훑어보았는데 이제 '기획자'라는 직업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보려 한다. 나는 IT회사, 정확히는 이커머스 업종의 웹서비스 기획 직군에 있다. 웹은 우리가 컴퓨터나 스마트폰, 태블릿 등 다양한 기기(디바이스)를 통해 접속하는 가상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검색을 할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기도 하며 때로는 은행업무를 보거나 메일을 주고받으며 소통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현시대를 살아가며 온라인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를 '웹서비스'라고 생각하면 쉽다.
우리는 주로 PC나 스마트폰에서 접속하는 브라우저 - PC의 크롬, 익스플로러 또는 아이폰의 사파리, 삼성폰의 삼성 인터넷 등 - 를 통해 웹사이트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 방문한 사이트에서 이용하는 서비스를 만드는 일을 한다고 보면 된다. 물론 꼭 웹페이지 안에서 행해지는 것만 다루지는 않는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의 메신저나 뱅킹 등과 같은 애플리케이션을 기획하기도 한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무형의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고 있다.
기획자는 회사의 규모, 업종, 직군 등에 따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제작자]로 불려지기도 하고 만들어진 서비스를 잘 이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하거나 위험을 제어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운영자]로 불리기도 한다. 회사마다 필요한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기획자라는 직업은 업무가 명확히 나뉘어 있다기보단 상당히 포괄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럼 기획자의 역할 중 제작자와 운영자는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실제로도 업무를 구분해서 하게 되는지 좀 더 자세히 얘기해보겠다.
브런치를 통해 이 글을 보고 있을 테니 브런치의 기획자라고 상상해본다. 제작자의 역할을 하는 기획자라면 브런치에 글을 쓰는 사람을 집중해서 생각하고 기획을 하게 될 것이다. 글을 어떻게 쉽게 작성하고 수정할 수 있으며 글을 쓰는 데 있어 어떤 기능들이 필요할지, 어떤 동선으로 쉽게 이용할 수 있을지 가설을 세우고 기술적 검증을 통해 서비스에 반영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예상했던 가설이 생각보다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 호평을 받기도 하지만 대체로 드물다. 주로 가설하에 만들어지는 신규 서비스는 욕부터 먹는 것이 인지상정.
그렇다면 운영자의 역할을 하는 기획자는 어떨까. 이렇게 나온 서비스를 실제로 작가들이 사용하면서 불편해서 못써먹겠다고 욕한 상황들을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본다. 어떤 기능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로그(기록)나 데이터를 통해 확인하고 자주 문제가 일어나는 패턴을 정리 정돈한다. 그 안에서 의미 있는 의견들을 취합하고 데이터화 하며 이것을 기반으로 필요한 기능들의 목록을 뽑아낸다. 즉시 반영이 가능한 것과 아닌 것을 우선순위로 나누고 빠르게 고객들에게 불편을 해소할 수 있는 것들 위주로 개선을 해나간다.
물론! 모든 회사가 업무를 위와 같이 동일하게 하지 않는다. 회사마다 업무 프로세스는 상이하고 실제로 기획자의 역할도 모두 다르며 제작과 운영이 나뉜 곳도, 합쳐진 곳도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회사들이 제작자와 운영자를 나눠서 운용하고 있을까? 글쎄, 나도 모른다. 경험상 주로 규모가 적은 경우 제작과 운영을 동시에 했고, 규모가 큰 회사의 경우는 팀이 나뉘어 있었다. 두 경험을 다해본 결과, 기획자를 운영과 제작의 롤도 완벽히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제작과 운영이 집중해야 될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에 팀이 나뉜다면 조금 효율적으로 운용된다는 이점은 있다.
내가 유독 경계하는 기획자의 유형이 있다. 바로 여러 가지 역할 중 '제작'만 고집하는 기획자다. 모든 기획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획자 = 제작자'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는 경우 '이런 자잘한 업무까지 내가 해야 돼?'라는 생각으로 운영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생긴다. 세상에 온전하게 새로운 기획이라는 것은 없다. 기획자는 '창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창의'를 담아내는 사람이다. 기획자가 신도 아니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낼 생각부터 해선 안된다. 자잘하고 단순한 업무라도 내 업무에 연결되어 있고, 빠른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라면 그 역할이 누구든 하는 것이 맞다.
내가 이런 사람을 경계하게 된 이유는 바로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3년 차쯤 됐을 때였나, 회사는 제작팀과 운영팀이 나뉘어있었고 나는 제작팀에 속해있었다. 늘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신규 프로젝트(구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만 도맡았고 실제로 서비스가 오픈한 뒤는 운영팀에 일임하고 다른 신규 프로젝트를 하기 바빴다. 운영팀의 의견은 귀담아듣지 않았고 실제 고객들의 반응이 어떤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제작팀과 운영팀은 서로 완전히 다른 일을 한다고 여겼고 운영팀에서 불만을 접수해도 뭘 몰라서 그런다며 넘겨버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운영팀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예 무지한 상태로 기획경력을 쌓아가던 어느 날, 열심히 내놨던 서비스를 접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실제 사용자 반응을 그제야 확인했지만 싸늘했다. 사용자가 없으니 서비스를 이어나갈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겹겹이 쌓인 경력에 비해 아무런 근거도 맥락도 없이 기획을 했던 나 자신을 발견했다. 운영 팀에서는 진작에 파악했던 것이지만 귀담아듣지 않았던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사용자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기획은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과 운영은 뗄 수 없는 존재이고 기획자라면 두 가지 시각 모두 균형 있게 갖춰야 한다.
기획자는 창조주가 아니다. 실제로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은 고객, 즉 '사용자(User)'다. 우리는 왜 서비스를 만드는가? 브런치는 왜 작가들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었을까?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이 쉽고 편리하게 글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작됐을 것이다. 이처럼 사용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거나 편리한 삶에 도움을 주기 위해 우리는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다. 제 아무리 혁신적인 서비스를 기획해서 내놨다고 해도, 고객이 필요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기획자는 서비스를 실제로 이용하는 사용자에게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나도 아니고 나의 상사도 아닌 '사용자'가 답이다.
때문에 고객의 소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듣는 운영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제작을 하는 경우, 주로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할 때가 많다. 또한 써보고 해 봐야 알게 되는 불편함을 모르고 기획을 진행하게 되어 오히려 불편함을 가증시키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창의적'이라는 것은 아무런 기반도 없는데 알아서 자라서 뚝딱 생기는 상상의 열매 같은 것이 아니다. 여러 경험의 씨앗을 통해 자라난 나무들에 이 열매, 저 열매 달아보며 생기는 것이 '창의'다. 많은 경험을 통해 사용자를 알고, 사용자를 기반으로 한 기획물이 나올 때 비로소 '창의'가 실현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반대로 운영자도 생각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만났던 일부 운영자는 '오퍼레이팅만 잘하면 되지 의견까지 전달해야 할 의무는 없다'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실제로 서비스가 잘 돌아가기 위해 반복적인 업무를 해야 하는 역할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적어도 운영 역할을 가진 기획자라면 반복적인 것들을 효율화하고 남은 시간에 사용자를 더 잘 알아가야 한다. 자신은 회사에서 주어진 역할이 그것이라 하면 할 말 없다. 그러나 언젠가 인공지능이 회사 업무를 대체하게 되는 날, 가장 먼저 정리될 대상은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겠다.
앞서 회사에서의 기획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기획이라는 것은 생활 그 자체다. 입사 후 처음 회사를 나가는 날, 이경로 저 경로로 다녀보다가 결국 가장 시간이 단축되고 가장 효율적으로 출퇴근이 가능한 경로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그것도 출퇴근에 대한 나의 생활 기획이다. 저녁에 가족들과 맛있는 닭볶음탕을 하기 위해 준비물을 사고 양념을 만들고 조금씩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맛을 내어 식사를 내놓는 것도 일종의 기획이다.
이처럼 기획을 한다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다. 회사에서의 기획은 조금 더 전문적인 지식을 요하고 기획 방법론과 같은 학문적 이론을 포괄하는 더 깊고 어려운 일일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생활에서 자신의 삶을 잘 기획하는 사람은 회사에서 기획자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겪어보니 그 성향 어디 안 가더라.
기획자로 살아가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이제 고작 10년, 아직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기 때문에 앞으로 기획이라는 일이 더 기대되고 흥미롭다. 기획자의 삶이 궁금하거나 기획자를 꿈꾸는 꿈나무들에게 이 즐거움을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나아가 기획자들이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만한 현업에 대한 이야기들을 써나갈 계획이다.
*위 내용 외 개인적으로 더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 프로필에 있는 [작가에게 제안하기]를 통해 메일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