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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Jan 30. 2023

하고 싶다와 잘하고 싶다의 간극

꿈은 죄가 없다.

초등학생 때였는데, 나는 엄마와 내 또래의 이웃집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와 버스를 오래 타고 어느 글짓기학원에 가서 상담을 받았다.          


글짓기 학원이라니, 당시로서는 꽤 선진적인 사교육 분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차분하게 커리큘럼을 설명하는 원장에게서는 동네 습학원 원장과는 사뭇 다른, 알 수 없는 인텔리함이 줄줄 흘러넘쳤다. 회의적인 우리 엄마와 산만한 이웃집 아이와는 달리 그 집 엄마와 내가 원장의 말을 경청하는 동안, 적어도 내 눈에는 모든 것이 그렇게 보였다.


첩첩이 공부거리가 쌓인 중학생 언니 오빠를 두고 엄마가 그 먼 곳의 학원을 찾아간  것은 정말 나를 그 학원에 보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마도 이웃집 엄마의 청을 거절하기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생애 최초의 격조 있는 학원 상담에 대단한 감동을 받은 나는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내 '비범함'이 마침내 엄마를 움직이게 했노라고.


당시 내 조그만 머리통 속에는 '나=글 좀 쓴다'라는 요망한 백지수표가 한 장씩 쌓이고 있었다. 평범하고 수수한 내가 남들의 칭찬과 주목을 끌어내는 유일한 수단이 글짓기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딴에는 대단한 보증수표였다.


장래희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나이 즈음부터는 노벨 문학상을 타는 거장 작가가 되리라 결심했다가 그보다는 카피라이터나 무대 디자이너 같은 트렌디한 직업을 떠올렸다가 다시 역시 난 글인가 생각했다가 이랬다 저랬다 하며 정작 별다른 노력은 없이 세월을 보냈다.

본래 십 대들의 가슴에는 치열하고 간절한 불길이 타오르지만 그 불길의 색이 워낙 다채롭고 혼란스러워서 이도 저도 못하고 불멍만 때리지 않던가? 나는 그랬던 것 같다.          


‘나=글 좀 쓰는 인간’이라는 머릿속의 백지수표가 갑자기 현금화를 요구해 온 것은 대학교 3학년 즈음, 전공을 살리든 죽이든 취업을 고민해야 할 시기였다. 친구들이 토익공부와 자격증에 열을 올리던 그때에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부끄럽게도) 소설을 써 보았다.     

      

소설의 주인공은 직장인이었지만 -내가 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기에-전혀 직장인 같지 않았고, 별 이유 없이 수시로 -직장인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인 줄 모르고- 고등학교 동창생들을 만났다. 또 당시 내가 좋아했던, 그리고 남들 보기에 좀 있어 보인다 싶은 온갖 취향의 작가, 책, 영화, 음악 등이 인과관계없이 난무했다. 심지어 주인공은 ‘그 소설을 쓰고 있는 나처럼’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그 소설을 쓰고 있는 나처럼’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여러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야기가 시작해서 결말에 이르도록 아무 일도,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도 인터넷 등에서 설익은 창작물을 접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쓴 첫 소설이 떠오른다. 졸작의 패턴이 이렇게나 비슷할 수 있구나 싶어서 등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다.


그러나 그 무렵의 나는 꽤 진지한 마음으로 소설을 완성하였고 학교 전산실에서 프린트를 한 뒤 캠퍼스 내 우체국에서 등기를 부쳤던 기억이 난다. 국내 굴지의 출판사가 주최하는 신춘문예에 응모한 것이었다.     

 

당연히 결과는 탈락이었고, 나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내가, 이 창의적이고 독보적인 감각을 지닌 내가 '정녕 직장에 매여야 할 몸인지'를 시험해 보기 위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머릿속 백지수표에 대항하여 직장인이 될 명분을 쌓기 위해 신춘문예에 쓰레기를 던져 넣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우습고 슬픈 것은 그 빈약한 도전과 포기를 뒤로 하고 직장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간절하게 글을 원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일이 힘들수록, 일상이 매서울수록, 사람이 미워지고 사람 사이에서 외로울 때마다.

지금 이 자리가 나에게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면, 비겁하게도 글이 쓰고 싶어졌다. 그러나 업무적인 잡념으로 가득 찬 뇌에는 달리 틈이 없어서 나는 그저 '쓰고 싶다, 쓰고 싶다, 뭔가 쓰고 시프다'만 반복하는 글을 쓰며 서글퍼했으니...‘소설을 써야겠는데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내 첫 소설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셈이다.               

   

출처 : wikimedia commons



뜬금없지만 문득, 우주 쓰레기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무한하고 적막한 우주 공간을 떠다니며 언젠가 대기권 속으로 불타 사라지기를 기다리느라 떠돌고 또 떠도는 우주 쓰레기. 어쩌면 이 세상 99.9%의 꿈은 ‘하고 싶다’와 ‘잘하고 싶다’ 또는  ‘할 수 있다’와 '할 수 다'의 까마득한 간극에서 장대하게 탄생했다가 미미하게 소멸해 버릴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그 버려진 꿈들이 ‘하고 싶긴 하지만 잘할 자신은 없는’ 우리의 내면을 부유하다가 가끔은 본의 아니게 루틴한 일상의 궤도를 위협하는지도.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내가 버렸지만 여전히 내 안에 존재하는 꿈을 조금은 편안하게 바라보게 되었다면, 그건 왜일까.     


아니 편안하다는 말은 거짓이다. 가슴 절절했던 ‘쓰고 싶다’의 절규를 벗어나 뭐라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여전히 하고 싶고 잘하지 못하는 내가 슬프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을 탐하듯 이 간극은 여전히 활짝 열려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좌절도 난관도 없이 쪼그라든 나의 꿈이 팍팍한 지구에서 쏘아 올려진 도피처에 불과한 것이었다 해도,  글을 쓰고 싶은 마음 그 자체는 아무런 죄가 없거늘, 나는 왜 지레 힘들어하며 그 마음조차 미워했던 것일까?

     

매일 한 시간씩 글을 쓰는 요즘도 나의 꿈은 밤하늘만 부유하고 있다. 별똥별처럼 불타 사라지는 단 한 번의 화려한 낙하를 꿈꾸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사소하고 지지부진하게 빛을 잃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쓰고 싶은 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질 때면 혼자 중얼거려 본다. 


'우주쓰레기는 아무 죄가 없다'


내 의지로는 닿을 수 없는 멀고 아득한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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