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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Mar 22. 2023

엄마의 마흔셋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나이

 검은 머리에 흰머리가 점점 섞여 회색빛이 되듯, 엄마는 늘 그 모습 그대로인 듯하다가 어느 날 보면 애틋하게 늙어있고는 했다. 그런데도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내가 열몇 살, 스물몇 살, 서른몇 살 때 사십 대, 오십 대, 육십 대였을 엄마는 내 기억 속에서는 늘 특별히 젊지도 늙지도 않은 그냥 ‘엄마’였다.     


사람의 뇌 용량은 한계가 있어서 모든 상황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한정된 배우와 소품으로도 여러 무대를 꾸밀 수 있듯 비슷한 상황에서 두루 쓰이는 관념적인 기억들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내 기억 속의 ‘엄마’는 젊은 배역도 늙은 배역도 소화 가능한 전천후 배우인 것이 틀림없다.        


딱 한 번, 엄마의 나이가 정확하게 각인된 기억이 있다. 재건축 전 낡은 주공아파트 복도에서 엄마는 아랫집 아주머니와 5층과 4층 사이 창가에 나란히 서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나는 열어놓은 현관문에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느끼던 그런 날이었다.     


그날이 엄마의 생신이었는지, 결혼기념일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어둑한 복도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아빠의 손에는 케이크와 샴페인, 그리고 마흔 세 송이의 장미꽃다발이 들려있었다. 그 꽃다발을 품에 안으며 꽃송이처럼 활짝 터트려 웃던 엄마는, 분명 마흔셋이었다.     


역산해 보니 그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밥상에 둘러앉아 케이크와 샴페인을 펼치며 형편보다 조금 나은 호사를 누리는 뿌듯함을 아는 나이였지만, 볼록렌즈처럼 모든 상황이 자기중심으로 투영되는 무고하게 철없는 나이이기도 했다. 그러니 마흔셋의 엄마를 종종 흔들어놓았을 고민과 걱정이 내 기억에 남아 있을 리 없다. 그저 그날만큼은 아빠와 엄마가 시름없이 마주 웃어서 좋았다는 기억, 그뿐이다.     


이제 칠순을 앞둔 엄마는 또 어떤 마음일까? 마흔을 훌쩍 넘긴 막내딸은 여전히 그 마음에 닿을 수 없다. 그러나 요즘 들어 종종 드는 생각은 마흔, 쉰, 예순 살이 되며 점점 늙어가는 마음 한편에 그 늙은 마음을 가만히 지켜보는 변치 않는 ‘각성의 마음’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늙지도 않는 마음은 내가 젊을 때는 한 마음이 되어 뛰다가 웬만큼 나이가 들면 슬그머니 트랙을 벗어나 여전히 헐떡이며 뛰고 있을, 또는 숨을 고르느라 주저앉은 늙은 마음을 말없이 관찰한다.


아니, 트랙을 달리는 마음이라니! 과한 은유는 접어두고 다시 마흔 세 송이의 꽃다발을 떠올려 본다. 노란색과 다홍색 장미꽃을 잎사귀 모양으로 길게 엮은 꽃다발은 노랑과 다홍이 거의 엇비슷한 색으로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엄마의 화장대 앞에 오래 장식되어 있었다. 엄마가 지금도 마흔 세 송이의 장미꽃다발을 품고 있을지, 아니면 마흔네 송이? 다섯 송이? 혹은 서른몇 송이일지도 모르지만, 엄마의 늙지 않는 마음과 나의 늙지 않는 마음이 서로 반짝 눈빛을 주고받을 때가 있다. 마흔이 넘어서 알게 된 더없이 소중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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