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부친상 연락을 받고 한동안 멍해졌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황망하기도 했지만 그때문만은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애잔함과 그리움이멍울멍울 차올라서 마음 깊은 곳에 소리도 없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같이 알던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리는데문득 고등학교 시절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그 친구의 집에 처음 놀러 간 날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본 어느 집보다 놀랍도록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의식하며 후다닥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이럴 줄 알았어. 우리 오빠가 또 이렇게 어지럽혀 놓고 나갔다니까.”
대체 뭘 어지럽혔다는 거지? 하고 보는데 친구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자그마한 콘택트렌즈 통과 그보다 더 작은 식염수 병을 들고 나왔다.
모든 가구는 같은 톤으로 맞춰져 있었고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친구의 방 침대에 걸터앉거나 화장실에서 손을 씻거나 주방에 가서 물을 마시며 나 또한 이런 쾌적함이 익숙한 척했지만, 사실 그 얼빠진 얼굴을 숨기긴 힘들었을 것 같다.
당시 나의 집은 먹고살기 위한 고군분투가 난투극처럼 펼쳐져 있었다. 집안일은 항상 임계점에 이르러서야 해소가 되었다. 그것이 직장에 매여 있는 맞벌이 부모님의 한계였고, 그 부모가 낳은 철없는 세 자식들의 한계였다.
저녁 7시가 훌쩍 넘으면 삼 남매가 하루 종일 먹고 놀고 어지럽힌 집으로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현관 벨이 울리면 셋 중 한 명이 재빨리 달려가서 -전자동 현관문이 없는 시절이었기에- 문을 열고, 뒤이어 나머지 두 명도 반드시 현관 앞까지 나와서 ‘다녀오셨습니까’하고 인사를 붙였다. 그러면 부모님은 낡은 구두를 벗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셨고,치열한 세상에서 자신을 구제하듯 끙차 집안으로 발을 들이셨다. 퇴근하는 부모님께 칼같이 인사를 붙이는 것은 우리 집 자식들에게 부여된 무언의 의무이자 고단한 부모님께 보내는 나름의 응원이었다. 일하는 부모님은 늘 응원이 필요해 보였고, 나는 희미한 미안함을 느꼈지만, 목청을 높여서 '다녀오셨습니까'하면 그뿐, 그것으로 내 의무는 끝이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아직 많이 늦지 않은 오후에 친구의 아버님이 퇴근해서 돌아오셨다.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셨다. 나는 응원이 필요해 보이지 않는 퇴근이 신기해서 또 한 번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아버님은 딸 친구들에게 존재감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말을 아끼셨고, 조심조심 움직여서 이미 충분히 깨끗한 집을 정리 정돈했다. 우리에게 저녁으로 돈가스를 시켜준 뒤 티브이 앞에서 무선 헤드셋을 끼고 앉아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작게 웃으셨다. 그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니친구의 아들이 꾸벅 인사를 해왔다.제법 팔다리가 길쭉하게 자란 모습이내딸이랑또래였던가 헤아려봐 졌다.
생각해보면우리가 각자의가정에서 엄마와 아내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 일이다. 결혼 후 처음 얼마간은 집들이며 돌잔치로 야단을 떨었지만 언제부턴가 가끔 연락을 주고받으며 한 가정을 책임지게 된 서로의 모습을 무덤덤하게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 애잔한 그리움의 출처를 알 것 같았다. 너무나도 확연히 멀어져있었다. 내부모님의 고단한 퇴근으로부터, 치열한 생계를 막연하게 방관하던 시절로부터, 돈가스를 먹으며 행복했던 그날 그 토요일 저녁으로부터 멀리 떠내려 왔다는 것을 알았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내 가정이 날로 풍성해지는 동안 내가 나고 자란 둥지가 쇠락해가는 것을 무심하게만 여겼다. 이제 퇴근 후 현관문을 열면 우당탕탕 달려 나오는 아이들의 인사는 우리 세대의 몫이 되었다.한 세대가 흘러가버렸다는거리감이 처음으로 생생하게 느껴져서 이상할 만치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흐름인 것을 알기에 상심한 친구의 손만 연신 잡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