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덕수궁, 청계천, 광화문을 아우르는 산책길이었다. 날씨가 좋을 때면 빌딩 숲을 지나 덕수궁의 돌담길로 자연스레 발길이 향한다.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걷는 연인들은 헤어진대요.” 라고 누군가는 말하면 “여기에 가정법원이 있었기에 이혼 부부가 많이 걸어서 그렇대요.” 라고 또 누군가는 답한다.
돌담길을 따라 가다 보면 서울시립미술관도 나오고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 정동 제일교회도 보인다. 조선말기부터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역사의 현장이지만 고즈넉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풍긴다. 역세권, 학세권은 들어봤어도 궁세권이라는 말은 서울 와서 처음 들어보았다. 역이나 학교를 도보로 이용할 수 있는 지역을 역세권, 학세권이라고 부르듯, 서울의 궁전들을 도보로 걸어 갈 수 있는 지역을 궁세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부동산 공화국답게 별의별 신조어도 다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역세권, 학세권의 극한의 효용 추구적인 어감에 비하면 궁세권은 그래도 낭만이 나름 담겨 있는 단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는 덕수궁 내부를 산책하는 것도 좋아했다. 성인 입장료는 보통 천원 정도이지만 점심시간 관람권이라는 것을 별도로 판매하는데 10회에 3천원 정도로 매우 저렴하다. 점심식사 후 혼자라면 덕수궁 내부를 유유히 산책하곤 했다.
대한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곧 중화전이 나온다. 고종이 직접 다스리던 시기에 중심이 되었던 이 전각은 이름처럼 조화를 뜻하는 기운이 서려 있었다. 낮은 담장과 깔끔하게 다듬어진 돌길, 드문드문 놓인 소나무들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중화전 앞 넓은 마당을 지나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서양식 석조건물인 석조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석조전은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의 위상을 알리고자 지은 건물로, 고풍스러운 회색빛 외벽과 정돈된 대칭미가 인상적이다.
점심시간의 덕수궁은 시간이 멈춘 듯 하다. 가끔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이 커피를 손에 들고 산책하는 모습이 보일 뿐, 대부분은 혼자 걸으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나도 그들 틈에 섞여,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복잡한 도시의 소음이 궁 안에 들어서면 마치 다른 세계처럼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하루는 한 분이 대출을 신청하러 오셨다. 재직증명서를 확인하는데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수문장으로 근무하시는 분이었다. 괜히 내적인 친밀감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약 백 년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이어져온 덕수궁의 수문장 직책과 전통이 이렇게 지금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거쳐 살아 있다는 것이 사뭇 신기했다.
문득, 옛 궁궐을 지키던 이들과 을지로 빌딩 숲을 오가는 나의 모습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