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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0 : 을지로 노가리 골목, 변화와 표류 사이

by 범버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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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의 금융가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레 을지로의 음식 골목들을 자주 찾게 되었다. 회식자리는 회사 근처의 무교동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삼삼오오 모이는 속닥하고 편한 자리는 을지로의 구비진 골목으로 향했다.


청계천과 을지로의 오래된 제조산업단지가 재개발과 보존 정책 사이에서 표류하는 동안, 허름하고 낙후된 골목 사이사이에 노포집들이 생겨났다. 저렴한 임대료와 합리적인 가격, 그리고 공급과 수요가 맞물려 일대는 20대들이 즐겨 찾는 힙(hip)한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정책이 표류하는 동안 젊은이들의 도피처가 된 힙지로는 그 특유의 도시적 감성이 마치 옛 홍콩을 연상시킨다.


힙지로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노가리 골목에서 먹는 값싼 노가리와 생맥주 한 잔이다. 20대들에게는 헌팅의 메카로 거듭났다고 한다. 을지로 직장인들 역시 부담 없는 가격에 열기를 만끽하며 기분 전환하기 좋았다.


여름날 저녁이면 해가 채 지기도 전에 작은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들이 골목을 가득 메운다. 희미한 을지로의 네온사인이 비추는 자리마다 웃음꽃이 핀다. 처음 서울에 발령받았을 때, 심란한 마음을 위로 받은 곳도 바로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었다.



5738.JPEG 지금은 사라진 을지OB베어


1980년 개업한 후 40년이 넘도록 노가리 골목의 터줏대감을 해온 을지OB베어. IMF 때도, 금융위기 때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노가리와 맥주 한 잔으로 힘든 하루를 견뎌냈다. 그러나 골목 일대를 장악한 경쟁업체가 을지OB베어 자리까지 건물주와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면서, 결국 을지OB베어의 계약 연장은 불허되었다. 시민단체들의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을지OB베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젊은 세대의 활력이 더해지며 상업화의 바람이 불었고, 옛 감성도 조금씩 퇴색했다. 을지OB베어가 떠난 자리엔 밝고 깔끔한 이미지의 새 가게가 들어섰지만, 왠지 골목에서 중요한 한 가지가 사라진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변화가 필연적이라 해도, 이렇게 하나씩 을지로와 청계천 일대가 바뀌어 갈 것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허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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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을지로가 완전히 재개발되어 화려한 빌딩으로 채워지면, 지금의 노가리 골목 같은 서민적 공간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워질지 모른다. 그렇게 또 하나의 역사, 우리의 기억도 사라져버리는 걸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을지로는 지금 표류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상업과 낭만 사이에서 어디로 가게 될까. 이 표류의 끝이 사람들의 소중한 일상과 추억을 품은 공간을 잃지 않는 방향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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