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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8 : 밥벌이와 밥하기의 지겨움

by 범버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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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 초반에는 호기롭게 요리를 시도해 보았다. 밀키트를 몇 번 조리해 먹고 간단한 재료를 사서 직접 요리에도 도전했다. 유튜브의 자취 요리 전문가를 무작정 따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재료들을 다 쓰기도 전에 유통기한이 지나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코로나 시기에는 부동산 시장까지 들썩이며 개인과 자영업자, 기업 구분 없이 대출 수요가 폭증했다. 수도권에는 아파트는 물론 오피스텔, 생활형 숙박시설, 상가, 지식산업센터까지 지으면 팔리는 부동산 광풍이 불었다. 이런 급격한 대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연고 없는 서울로 갑작스레 투입되었고, 매일 각종 대출 업무를 처리하며 야근이 일상이 되었다. 저녁은 책상에 앉아 서브웨이 샌드위치나 햄버거로 해결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제대로 된 집밥은 며칠에 한 번 먹을 수 있을까 말까 하니, 냉장고 속 식재료의 유통기한은 늘 말썽이었다. 결국, 먹지도 못한 채 음식물을 버리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코로나로 인해 식당 출입마저 자제하게 되니 자연스레 배달 음식에 의존했다. 당시엔 직원 중 한 명이라도 코로나에 감염되면 지점 전체가 격리에 들어가고 심하면 며칠간 영업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며칠만 업무가 중단되어도 은행이나 대출을 기다리는 고객 모두에게 큰 피해였기에 외식은 더욱 꺼려졌다. 결국, 집에서 직접 요리하는 게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 것보다 시간과 돈이 더 들어가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렇게 배달 앱과 가까워졌고, 야근과 잦은 배달음식으로 체중만 불어나던 시기였다.


얼마 전 당시 배달 앱에 남긴 리뷰와 사진을 보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힘들고 치열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는데, 즐겨 찾았던 음식점들 상당수가 이미 폐업으로 사라져 있었다. 대한민국 영세 자영업자들의 현실적 어려움이 피부에 와닿아 씁쓸함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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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에 지치면 밥을 먹고 밥을 먹고 나면 다시 밥벌이를 하게 된다. 결국 삶이란 '밥벌이와 밥하기'의 끊임없는 반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훈 작가의 《밥벌이의 지겨움》에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같이 보이는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거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中


은행에 다니다 보니 은행 업무와 은행 사람 외에는 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매일 반복되는 업무와 비슷한 환경 속에서 그저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다짐한다.
뭘 해먹고 사는지 쉽게 짐작되지 않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노동에도 삶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겠다고.


그 이후로는 일하는 시간과 일상의 시간을 확실히 구분하기 위해 작은 시도들을 하고 있다. 집에서는 회사와 무관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업무와 상관없는 소소한 행복을 누린다. 그렇게라도 삶과 노동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긋고 싶었다. 이것이 지루한 밥벌이와 지겨운 밥하기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저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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