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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6 : 닭한마리? 세명이서 닭 한마리만 먹나?

by 범버맨

같은 사무실의 K 차장님은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뒤 서울에 정착하신 분이었다. 맛집에 일가견이 있으셨는데, 어느 날 퇴근 후 '닭한마리'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속으로는 '장성한 성인 남성 셋이 닭 한 마리만 먹는다고? 1인 1닭을 말하는 건가?' 생각을 했다. 동대문의 닭한마리 골목까지 따라가고 나서야 닭한마리는 음식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마리, 두 마리 하듯이 닭을 세는 단위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닭한마리'라는 음식 이름이었다. 닭에 육수를 넣고 전골 형태로 먹는 서울의 요리라고 했다. 의외로 서울 사람들도 이 음식이 서울 고유의 것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닭 한마리를 파, 마늘과 육수에 끓여 먹다가 칼국수 사리도 넣고 양념 다대기도 넣고 소주를 한 잔씩 곁들어 먹으면 별미였다. 아, 그리고 소주는 참이슬을 먹어야 진짜 서울의 맛.


서울에는 전국 팔도의 음식점 뿐 아니라, 서울만의 독특한 음식들도 많아 이런 발견 또한 색다른 재미였다. 그 후로도 퇴근 후 K 차장님을 따라 회사 근처 맛집들을 탐방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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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음식의 또 다른 대표 주자는 평양냉면이 있다. 이름에 ‘평양’이 들어가 있지만 시간이 흐르며 서울화된 음식 중 하나이다. 백석 시인의 시 「국수」에는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의 고향에서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던 국수의 형태가 현재 서울에서 즐겨 먹는 평양냉면의 원형이 아닐까 싶었다. 정작 이북의 현지에서는 냉면을 이렇게 슴슴하게 먹지 않고 식초와 겨자를 팍팍 넣어 먹는다고 하는데 말이다. 처음 서울에 발령난 후 사무실 근처의 유명한 평양냉면집을 몇 차례 찾았다. 슴슴한 맛이 일품이지 않냐는 말에 "제 것은 맹물 맛이 나네요. 뭘 덜 넣고 만든 것 같습니다만…" 이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촌티를 낼 수 없어 묵묵히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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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 입문자용 식당들도 더러 있는데, 이곳들은 대체로 동치미 국물이나 육수의 맛을 더 강하게 내서 처음 먹는 사람들이 슴슴한 맛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치 부산에서 '진짜 돼지국밥을 못 먹어봤네' 소리를 듣는 것처럼 서울에서도 '진짜 평양냉면 맛을 못 봤네'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혼자서도 평양냉면을 먹으러 다니곤 했다. 나름의 노하우로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저녁 시간대를 골라서 방문하여 참이슬과 곁들어 먹기도 했다. 찌르르 내려가는 소주에 차가운 평양냉면 국물을 더하면 이 또한 괜찮은 조합이었다.


마장동의 소고기, 을지로의 골뱅이, 장충동의 족발, 그리고 광장시장의 빈대떡과 육회 탕탕이까지.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양한 음식 골목이 있어 서울의 맛을 탐방하는 것은 지방 출신 직장인에게는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가끔 경조사나 회사 일로 서울을 찾는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마치 서울 토박이인 양 능숙하게 서울 음식을 소개하고 자연스레 참이슬을 주문한다. 친구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이야, 너 이제 완전 서울 사람 다 됐네!” 하고 농담을 던진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땐 닭한마리도 평양냉면도 생소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이 음식들로 누군가를 안내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음식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야말로 그 도시의 문화와 생활에 가장 빨리 적응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서울의 음식들과 함께 나도 모르는 사이 서울이라는 도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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