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하략)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중
분명 우리는 지금 왕궁을 향해 분개하고 있다.
분명.. 우리는 옹졸하게 분개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
난 왜 아직도 조그마한 일에 분개하는 것으로 느껴질까..
바람 앞의 촛불
대통령의 비리를 보고도 옹호하는 여당 정치인들이나, 그것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하는 검찰을 욕한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욕먹지 않을 사람인가.
내가 속한 사회 내에서 바른 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당신은 권력의 두려움, 사회적 관계 안에서 비리를 밝힐 수 있는 내부자, 검찰이 될 수 있는가.
촛불집회에서 초등학생이 당당히 발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자신의 엄마, 아빠한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대통령을 향해 바른 소리를 하듯 눈 앞의 직장 상사 앞에서 말할 수 있느냔 말이다.
높은 곳에 멀리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나의 바로 앞에 있는 작은 권력자에게 당당할 수 있는 내 모습 말이다.
말 못 하는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용기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몰아세우고 싶지도 않다.
촛불이 모여 횃불이 되었어도 다시 촛불로 돌아가면 바람을 두려워하는 것뿐이다.
촛불을 지키는 방법
촛불을 지키는 길은 옳은 말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권력의 두려움 앞에 입을 닫지 않는 사회 말이다.
그래서 <당신은 진정 진보인가> 글에서 '나'와 '너'를 객관화하여 공론화하라고 말했다.
https://brunch.co.kr/@darkarkorn8cnl/172
진보적 능력은 나와 너를 꺼내어 공론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이나 안건을 꺼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능력이 지금은 대부분 위에 있다.
리더가 수용적이지 않으면 아래에서는 말도 꺼낼 수 없다.
진보적 제도가 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위, 아래의 의견을 고르게 반영할 수 있는 회의 제도를 만든다.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만약 옳은 말을 한 것으로 밥줄이 끊긴다면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제도만으로 실제적 효과를 보장할 수 없다.
지금도 전체 회의가 있으나 말단이 자유롭게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
진보적 문화는 너와 나를 꺼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사회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등병이 윗 계급에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것 말이다.
명령을 무조건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 명령이 옳은 것인지 꺼내고 공론화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반대하는 것은 언제나 불편하다.
하지만 그것을 합당한 이유 없이 꺾을 수 있다면 불합리하다.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불합리함을 이겨내야 한다.
아직 내가 그런 일을 당하거나, 할 수 있다면 촛불은 쉽게 꺼져버릴 테니.
우리는 촛불
탄핵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맞다.
권력자의 자리만 바뀐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위에 있는 대통령을 밀어냈다고 내 눈앞의 대통령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테니.
우리 모두의 인식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뀔 것이다.
주말에 모였던 촛불은 다시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 소중한 불씨를 서로 지켜줘야 한다.
아래는 위로 말할 용기를 가지고, 위는 아래를 수용할 아량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위와 아래가 연결되어 구분되지 않는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말한 위, 아래가 모두 촛불을 들었던 '국민'이란 이름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