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문화권이든 사랑에 '빠진다' (Fall in love)는 표현이 존재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나'를 상실하고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두 사람이 애초부터 '있는 그대로의 서로의 모습'을 온전히 좋아하게 된다는 건 사실상 환상에 가깝다. 다르게 태어났고, 또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다른 배경 속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아무런 노력 없이도 서로 이상형에 해당할 확률은 매우 낮으니까.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단점도, 안좋은 습관도,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까. 처음 그 사람을 좋아했던 이유가 아닌 다른 모습을 보며 회의에 빠지기도 할 것이고, 나를 지적하는 상대를 보며 기분이 나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변한다. 잘 어울린다는 그 사람의 말에 좋아하지 않던 색깔의 옷을 입어 보게 되기도 하고, 그 사람이 바흐를 좋아한다는 말에, 평소에 잘 듣지 않던 클래식공연을 함께 가서 졸기도 한다. 그녀에게 보내는 오글거리는 이모티콘도, 핸드폰 화면을 채운 그 사람의 사진도, 그저 너와! 나의! 연결! 고리! 라는 생각에 모두 기분좋은 것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런 모습이 이전의 자신과 이질적이라는 걸 스스로는 모르는 경우도 많다. (다만 주변에서 그럴 순 있겠다. 너 미쳤냐고) 당연히, 그 사람이 골라준 그 옷의 색깔이 당신이 보기에는 잘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다른 모두가 그 모습을 비웃더라도, 그 사람만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나의 모습을 그 사람이 더 좋아해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물론 이미 어느 정도의 삶을 거쳐왔기에 많은 경우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성격이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있지만, 그것은 이미 그저 자각으로 스쳐지나갈 뿐이다. 이런 내 성격 때문에 그 사람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는 것이 더 힘들고, 그 사람이 이런 나를 싫어해서 나를 떠날까 두려워하게 된다. 그 사람의 웃음을 보고 싶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사랑을 받고 싶기 때문에 나는 나도 모르게 나를 흔든다. 나를 쥐고 있기에는 이미 나는 그 사람이 너무 좋다.
그 변화는 관계의 윤활유가 된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기존에 내가 그것을 싫어했었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웃음으로 상쇄된다. 처음에는 그런 변화가 익숙치 않기에 불편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을 싫어했던 자신의 모습조차 기억나지 않게 되기도 한다. 그 사람의 선호가 나의 것이 되고, 나의 선호가 그 사람의 것이 된다. 사랑하면 닮아간다는 말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있는 관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변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거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조금씩 양보하고 익숙했던 자신의 모습을 희생하며 시간이 지나면, 사랑 안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자신에 대한 상실의 공포조차 불필요할 만큼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순간이 오게 된다. 너와 나는 차츰 우리가 된다. 서로에게 물든다.
문제는 스스로를 고착시킨 채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정의내려 버리는 경우이다. 그리고 상대에게 말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모두 사랑해 주면 안 되느냐"고. 이런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은, 상대에게 나를 맞추어 가는 과정을 '나를 없애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미 나는 나로서의 색깔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한들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내가 가지고 있는 내 모습에 그 사람의 색깔을 덧칠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나는 새빨간 색을 가진 사람이면서 때로는 분홍색이 될 수도 있고, 다홍색이 될 수도 있다. 관계를 통해 비로소 타인의 세계를,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변화의 범위는 표면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에 더욱 중요하다. 어떤 말투, 어떤 행동은 상대의 내면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것은- 특히 사랑을 상호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님에도, 그는 어쩌면 사랑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받을 때의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차츰 존중을 잃어가게 된다. 존중을 잃으면 배려도 줄어든다. 줄어든 배려 속에서 서로 '나'만을 우선시하는 관계라면, 관계는 필연적으로 휘청거린다.
특히 최악은 자존감을 갉아먹는 관계다. 그 관계가 아니더라도 이미 스스로에 대한 존재 의의를 부정하기 쉬운 상처투성이 세상 속에서, 쉴 새 없이 자괴감을 느끼게 하는 관계는 건강할 수 없다. 이제야 겨우 아물어가는 상처에 다시 면도칼을 들이미는 순간 상처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이 패인다. 그런 순간들은 상대가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발생해 버리기 때문에, 그런 순간들에 대해 지적하고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심지어 상대가 그에 대해 끊임없이 방어한다면, 나를 '예민한 사람'으로 몰아세운다면 더욱 그러하다. 사람 -사랑- 은 가장 아름답지만, 그렇기에 가장 잔인하다.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랑의 필요조건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른만의 일이다. 그리고 어른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상처를 그저 '예민함'으로 보지 않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느리지만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명민하지 않더라도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다. 나이가 어려도 어른이 될 수 있고, 나이가 많아도 어른이 아닐 수 있다.
즉, 관계의 시작은 우연일 수 있지만, 관계의 지속 여부는 그 관계가 얼마나 잘 '만들어' 지는지에 달려 있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관계는 모두 삐걱거리기 마련이다. 당신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서 안 풀리는 게 아니라, '맞춰갈 마음이 없는' 사람이어서 안 풀린다는 것이다.
관계를 '만들어갈'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스스로를 괴롭히며 그의 옆에 머물 필요가 없다. Because he's just not that into you. 그야말로 그는 당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거다. 아니면 당신보다 그 자신을 너무 많이 사랑해서, 이미 충분히 행복해서, 감히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그러니 노력을 포기하는 사람이라면,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웃음을 위해 기꺼이 습관을 바꾸고, 또 당신과 삶을 맞춰갈 준비가 되어 있는 누군가가 분명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