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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달호 Oct 27. 2018

마녀처럼 쓰자

일상의 풍경에 이단자로 살아가며 글쓰기



요네하라 마리를 소개할 때 나는 줄곧 ‘연애하고 싶은 여자’라고 표현한다. 좋아하는 여자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 그렇다. 쿨하고, 知的이고, 그러면서 사차원적인 매력이 있고, 호기심 강하고, 글도 잘 쓰고, 아마 돈도 많을 것 같다. (그래, 마지막 이유가 가장 크다. 쳇.)     


최근 요네하라 마리를 다시 뒤적거려봤던 건 ‘에세이스트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 이모저모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동시통역사이자 작가인데, 주로 에세이로 유명하다. 그녀의 에세이가 뛰어난 것은 유려한 문장 때문이 아니다. 사실 요네하라의 문장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요네하라의 에세이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녀의 글 속에 꿈틀거리는 ‘스토리의 힘’ 때문이다. 오로지 이야기의 힘으로 에세이를 밀고 나간다. 그것이 요네하라 에세이의 강력한 장점이다. 통역사라는 직업이 아니었으면, 그녀만의 독특한 삶의 여정이 아니었으면 결코 쓰지 못했을 이야기가 가득하다.      



오로지 에세이스트라는 직업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 직업을 기본 타이틀로 하고, 거기에 ‘무슨 분야의 에세이스트’라는 식으로 조끼를 입듯 타이틀을 걸쳐야 한다. 그런 정체성의 문제를 나는 요새 고민하던 중이었고, 요네하라 마리의 <마녀의 한 다스> 한 대목에 다시 눈길이 머물렀다.      


“늘 보아오던 풍경 속에 이단분자가 섞이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일 것이다. 희한하고 요상한 일에다 의외의 발견, 놀라운 재발견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늘 당연하게 여기던 정의와 상식에 찬물을 끼얹어보고 싶다.” - 요네하라 마리, <마녀의 한 다스>, 마음산책, 29페이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글 쓰는 사람으로 자신의 삶을 꿈꾸고, 혹은 “실컷 글만 쓰며 살 수는 없을까?”라고 푸념하기도 한다. 일단은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편의점이라는 풍경 속에 글쟁이라는 이단자로 살아가는 삶. 그녀는 나를 이렇게 정의해주었다. 당신도 어떤 풍경에서든 이단자로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요네하라 마리를 좋아하고, 그녀의 문장을 닮고 싶다. 물론 ‘살아 있다면’이란 단서와 함께. 

불꽃처럼 살다간 그녀의 운명까지 사랑한다. 하늘나라에서도 마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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