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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달호 Sep 17. 2018

편의점 점주의 직업병이란

뭐든지 규칙을 따라야 직성이 풀려요

내가 원래부터 정리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제발 방 청소 좀 하고 살라고 어머니께 꾸중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편의점을 시작하고부터 성향이 바뀌었다. 정리를 ‘잘한다’라기보다는 정리에 ‘규칙을 정한다’는 표현이 적확하겠다. 뭐든지 규칙을 만드는 버릇이 생겼다. 색상과 용도, 재질, 사용 빈도에 따라 끼리끼리 ‘연관 진열’을 한다. 옷장뿐 아니라 찬장과 신발장, 발코니 수납장, 책상 서랍까지 그렇게 한다. 우리 집에 놀러온 친구들은 장을 열어보고는 놀란다. “얘가 편의점을 하더니 자기 집도 편의점인 줄 안다”며 놀린다.


편의점 진열대에는 규칙이 있다. 라면 옆에는 수프와 죽이 있고, 거기서 뒤돌아보면 간편식과 프레시 푸드(삼각김밥, 샌드위치, 도시락 등)가 줄 맞추어 대기 중이다. 봉지 과자 옆에는 박스 과자가 있고, 과자 옆에는 사탕, 사탕 옆에는 초콜릿과 에너지바, 그 옆으로는 믹스 커피와 원컵 매대가 있다. 스타킹, 생리대, 여성 속옷은 같은 진열대 위아래에 모아둔다. 우리 편의점은 오피스 상권이다 보니 실내용 슬리퍼가 많이 팔리는데, 슬리퍼는 잡화 매대 맨 하단에 치수별로 차곡차곡 쌓여 있다. 


초콜릿 - 에너지바 - 젤리- 쿠키로 이어지는 '다이어트 파괴자'의 동선


워크인 냉장고에 진열된 음료수도 아무렇게나 있는 게 아니다. 크게는 커피, 탄산, 과즙, 생수, 주류 항목별로 각각 다른 칸에 분류한다. 같은 브랜드의 캔 커피라도 라테(라떼), 아메리카노, 블랙 순서로 자리를 잡아준다. 용량 순으로 모아놓고, 어떨 때는 용기 색깔까지 고려한다. 녹차, 홍차, 곡물 음료는 한 선반에 모아두고, 손님들이 숙취 해소용으로 찾는 음료는 또 그들끼리 붙여놓는다.


과자도 규칙에 따른다. 우선 봉지 과자와 박스 과자를 분류하고, 국산과 수입을 나눈다. 감자 스낵은 그들끼리 모아놓은 후 순한 맛, 매운맛, 독특한 맛 순서로 진열한다. 1+1이나 2+1 행사가 진행되는 제품은 교차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제조사별로 모아놓아야 손님이 고르기 편하고 매출 상승의 효과가 있다. 박스 과자도 간식용 쿠키와 식사 대용의 도톰한 쿠키, 혹은 안주용으로 대체되는 쿠키를 구분해놓으면 효과 만점이다. 


연관 지어 진열하는 버릇은 점점 ‘병’의 수준이 된다. 삼각김밥을 진열하는 데에도 나름의 규칙을 만든다. 일단 크기별로 나누어놓고, 매운맛과 순한 맛을 끼리끼리 모아둔다. 참치와 대게딱지장, 명란마요는 바다를 연상시키니 한데 모아놓고, 제육볶음, 전주비빔, 닭갈비볶음은 또 그들끼리 모아두는 식이다. 줄 김밥도 이 같은 규칙에 따른다. 샌드위치는 비닐 포장이 된 것과 플라스틱 용기에 든 걸 구분하고, 두께와 속 재료가 유사한 것끼리 모아놓는다. 빵은 일반 빵과 디저트 빵, 서너 개가 들어 있는 세트형 빵을 구분해놓는데, 일반 빵도 단팥빵, 카스텔라, 곰보빵, 슈 등 종류를 고려해 진열한다.


다른 편의점에 갔는데 내가 생각하는 규칙과 다른 방식으로 제품이 진열돼 있으면 막 옮기고 싶어진다. 편의점 15년 차인 친구 김성수는 자기 집 냉장고에 있는 음료수까지 상표가 잘 보이도록 반듯하게 정리해놓는다. 사실 나도 그렇다. 찬장에 컵을 넣어둘 때에도 손잡이 위치를 똑같은 방향으로 맞춰놓는다. 비뚤어져 있으면 눈에 거슬린다.



지하철에 탄다. 맞은편에 사람들이 일렬로 앉아 있다. 패딩을 입은 사람, 코트를 입은 사람, 붉은 옷을 입은 사람, 검은 옷을 입은 사람, 머리가 긴 사람, 머리가 짧은 사람, 키가 큰 사람, 키가 작은 사람…. 뒤죽박죽 앉아 있는 모습이 꽤나 눈에 거슬린다. 종류별(?)로 구별해서 다시 진열(?)하고 싶어진다. 이게 다 직업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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