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1)

untitled

by daroo

예쁘장한 하얀 얼굴에 말간 웃음이 피어오른다.

그녀는 언제부턴가 가을의 서늘한 냄새를, 겨울의 통쾌한 눈보라를, 여름의 태양에 빛나는 것들을, 봄의 향긋한 꽃봉오리들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였을까. 휴대폰으로 그런 순간들을 찍는 것은 그녀에겐 자연스러운 수순이기도 했다.

화려하고 수수한 모든 것에 아주 완벽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자연뿐이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과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아주 작은 부분에도 세상이 담겨있는 것 같은 것들.

자연. 그것만이 그녀에게 유일한 뮤즈였다.

그녀의 앨범은 뒤죽박죽이었지만 좋아하는 순간들을 모아놓은 보관함에는 세상에 이런 것들도 존재했었나 싶은 것들이 차곡히 쌓여있다.

그녀는 내 영혼과 세상을 이어주는 것은 그 아름다운 순간들을 찍을 찰나뿐이라고 했다.

아주 잠깐의 순간뿐이라서 욕심이 생기지만, 결코 잡을 수 없는 것.


가끔 도시의 야경이라든가. 아주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우리네의 광활함을 보게 되면,

자연의 손을 빌려 태어난 존재의 재능을 인정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름답고도 간결하며 확실한 떨림을 주는 것은 누군가의 손을 빌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손을 빌린다는 것은 행위도 포함되는 것일까.

욕망이 드러나지 않은 선의는 아름다운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아름답지 않은 것인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도 있어. 세상을 이것과 이것이 아닌 것으로 정의하는 게 옳은가?

내가 옳고 그름을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인가? 생각의 가지는 한없이 뻗어져 나가 그녀를 메우고 있었다.

-

세상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산다.

그들은 그들의 갯수만큼이나 다양해서 우리는 모두를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녀 같은 사람도 있지만, 공중전화박스에 몸을 기댄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 같은 사람도 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한참쯤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디서부터였을까. 어릴 때는 남들과 비슷하게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대학교 1학년. 디자인과를 다니다 적성을 고민하며 잠시 휴학했을 즈음이었다.

적성뿐이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또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살아왔는데.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얼떨떨하면서도 갓 태어난 기린이 되어 걸음마는커녕 일어서는 것조차 바들대는 기분이었다.


그날은 묘했다.

집에서 한없이 빈둥대며 뒹굴거리던 그는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이 너무 예뻐,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온 차였다.

큰 호수를 둥글게 둘러싼 습지 공원이었다. 조금만 올라가면 작은 동산 위 쉼터가 있어 내려다보기도 좋았다.

한참을 멍 때리며 구경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호수와 푸른 하늘, 저들끼리 뭉쳐 흘러가는 구름까지. 사진 같은 화면이 비친다.

습지 공원 귀퉁이, 갈대가 늘어진 곳에 쓰레기가 넘실거렸다.

역시 말 안 듣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며 쓰레기 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몇 시간의 물멍을 마무리하고 슬그머니 동산을 내려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벌써 시야는 어둑해져 이젠 호수도 컴컴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드문드문 놓여있는 가로등 불빛만 어스름했다.

낮에는 꽤 있는 것 같던 사람도 이제는 나밖에 없는 것 같다. 텅 빈 공원이 으스스해져 피우던 담배를 서둘러 껐다.

얼른 집에 가야지.

주차장 입구 부스에 앉아있던 정산원이 잠에서 막 깬 듯 부스스한 표정으로 계산을 했다.

경비원 유니폼을 입은 그는 거스름 돈을 주며 머쓱하게 웃는 낯으로 인사했다. 자고 있던 모습을 들킨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지.

“아저씨. 호수에 쓰레기가 많더라고요. 사람들이 말을 참 안 듣네요. 하하”

정산원은 아유 매일 관리해도 소용없어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쓰레기가 어디에 있남? 어제도 싹 청소 했는데.”

“그 동산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보이던데요. 꽤 오래된 것 같던데.”

“그래? 내가 함 봄세. 고마우이”

내심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기분 좋게 안녕히 계세요. 인사하며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며칠뒤, 그 공원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다른 정산원이 계산을 해주었다.

로테이션 근무겠지. 밤에도 지키는 것 같던데. 별 다른 생각 없이 공원을 떴다.

-

몇 달 뒤, 여자친구랑 헤어진 그는 착잡한 마음을 달래러 공원에 다시 방문했다.

두어 달 만난 여자친구였지만 서로의 성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인연의 끝을 맺었다. 크게 싸운 일도 없지만 크게 애정을 나눈 것도 없던 것 같은 사이었다.

뭔가를 별로 해보지도 못한 것 같은데, 그녀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우린 너무 다른 것 같다는.

이미 헤어진걸 뭐 어떡하겠어. 사랑스러운 미소가 예뻤던 그녀가 가끔 생각나기는 했지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취미는 없었다.

동산의 쉼터에 올라 호수를 바라보는 것은 이제 조금씩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는 듯했다.

갈대에는 여전히 쓰레기들이 넘실거리고, 호수는 꽤 깊어 파랗다 못해 가끔은 까맣게 보였다.

그리고 햇빛에 반짝이는 윤슬들을 보면서 물멍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많이 그리웠나. 사라지지가 않는구나. 보고 싶은 그녀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 같아, 호수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동산을 내려와 갈대가 무성한 산책로까지 걸어 들어왔다.

경비원의 말대로 동산에서 보이던 그 많은 쓰레기가 갈대길에서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산책로는 중간중간 둥그렇게 구경할 수 있는 쉼터가 있었는데, 그는 널따란 벤치에 걸터앉아 멍하니 호수를 바라봤다.

물에 비춰 반짝이던 윤슬이 점차 커지면서 그녀가 빛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자연스레 눈이 감기고 그녀의 얼굴, 그녀의 웃음소리.. 나를 부르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크게 남은 것 같아. 그녀에게 가고 싶어…

손에 무언가 걸렸지만 아랑곳 않고 넘어섰다. 물비린내가 훅 끼치고 몸이 무거워지며 숨이 막혔다.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나는 계속 가고 싶었다.

-학생! 그러다 죽어! 정신 차려!

콜록콜록. 갑자기 훅 들어오는 산소에 정신없이 기침이 나왔다. 멍멍한 귓속으로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

감았던 눈을 떴을 때는 그녀의 아른한 얼굴대신 몇 달 전 보았던 정산원의 얼굴만 보였다.

어. 아저씨 계셨네요. 아직 안 그만두고…

다시금 웃는 낯을 지어 보이려던 나는 갑작스러운 피곤함과 현기증이 몰려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

눈을 떴을 때는 병실에 산소호흡기를 한 채였다. 눈을 깜박거리는 나를 발견한 간호사는 의사를 호출하러 후다닥 나갔고

나는 물에 잠긴듯한 귓속을 파고드는 작은 이명을 견디면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반듯하고 네모난. 하얀 천장을 얼마간 바라보다가 나는 이곳에 왜 왔는지를 찬찬히 짚어보았다.

기억나지 않는데, 어떻게든 잔상이 남은 것 같은 기억을 끄집어 내려다 두통만 얻었다.

의사를 데려온 간호사가 옆에 서서 고개를 끄덕인다. 둘이 작당모의를 하는 것 같아.

얘기를 나누던 둘은 오묘하게 나를 바라보다 커튼을 치고 사라졌다.

부모님은 자살소동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입원기간은 늘어만 갔다.

우리가 너한테 부족하게 해 준 게 뭐가 있니 대체…!

얼굴을 덮으며 흐느끼듯 소리치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런 엄마의 어깨를 끌어안은 아빠의 표정도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내 아들의 가죽을 뒤집어쓴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


나도 모르는 내 일들이 있는 걸까?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쓰레기 보듯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호수에 빠지면서 무언가 고장 났던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칼칼한 목과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침대에 반쯤 걸친 몸이 보인다.

이제껏 살면서 몽유병은 없었는데.

전신은 구타당한 듯 아프고 축 늘어져 낮에는 삐그덕 거리는 몸을 운신하느라 바쁘다.

정신은 멀쩡한데 무언가에 눌린 것처럼 몸이 무거운 기분을 아는가?

잠에 들지 않으려 핫식스를 여러 캔 먹어도 보고, 일부러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밖에 서있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잠에 들었고 정신을 잃은 뒤의 기억은 없으며, 몸은 매일같이 무겁고 아침에는 항상 침대에서 눈을 뜬다.

이상한 날의 반복이었다.

이대로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아. 어디서 잠에 들던 눈을 뜨면 내 자리에 있는 것도, 그 사이의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는 몸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목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들도.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깨어있는 시간보다, 자는 시간이 더 많다고 느껴졌다.

나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는 그 무언가가 정작 나보다 나로 활개 치는 시간이 많다면. 그것은 나라고 할 수 있는가?

깨어있는 동안의 나는 운신도 제대로 못하는 몸으로 침대에만 누워있는데.

한동안은 이런 생각뿐이었다.


그날은 왠지 잠이 오지 않아 애꿎은 병실 천장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keyword
팔로워 1
작가의 이전글바텐더 A 씨의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