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Out at Hanover
봄 학기 기말고사 기간을 열흘정도 앞둔 5월 말, 기나긴 겨울이 가고 드디어 해노버에도 화사한 봄이 오나 했는데 웬걸, 오후 내내 우중충하던 하늘이 시꺼메지더니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둥번개가 무섭게 내려치는 게 아무래도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돌아온 나는 기숙사 방안에 앉아 포효하는 듯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비는 도저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휴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지.’ 하며 우산을 챙겨 터덜터덜 방을 나서려던 참에 또 한 차례 요란한 천둥번개가 꽝 내리쳤고 순식간에 방 안 모든 전기가 나갔다. 기숙사 복도에 나가보니 나와 똑같은 표정을 한 아이들이 방 밖에 나와 “너희 방도?” 하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정전이 일어난 것은 우리 기숙사만이 아니었다. 캠퍼스 내 모든 식당들도 갑자기 전기가 끊기는 바람에 안에 있던 학생들이 밥 먹다 말고 깜깜해진 식당을 대피하는 웃지 못 할 소동이 일어났다. 기숙사 대부분도 정전 상태였고, 심지어 도서관, 체육관에도 전기가 나갔다. 다트머스 캠퍼스뿐만 아니라 해노버 타운 전체가 군데군데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기가 끊긴 것 같았다. 정말인지 해노버에 살면서 이런 카오스는 처음이었다.
여기저기서 각자 다른 일을 하다 피난 나온 아이들이 여전히 비가 쏟아지는 시커먼 거리를 배회하며 갈 곳을 찾고 있었다. 몰리스를 비롯한 해노버에서 전기가 끊기지 않은 몇몇 운 좋은 식당들은 갈 곳 없는 배고픈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예상치 못한 저녁 장사 대박이 났다. 전기가 끊기지 않은 맥로플린, 맥클래인 기숙사에는 커먼룸에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커먼룸이 꽉 차자 심지어 기숙사 복도 땅바닥에 앉아 공부하는 열정을 보이는 아이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떠돌이 신세가 되어 정처 없이 걷고 있던 나는 단체 카톡방에서 정훈이와 토니가 Geisel(다트머스 캠퍼스 북쪽 끝에 위치한 의대 건물)에는 전기가 멀쩡해서 세미나 룸 하나를 통째로 잡아 에어컨까지 틀고 공부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는 바로 그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정말 그 곳은 밝은데다가 시원하기까지 한 최고의 안식처였다. 의대 건물은 그곳에서 연구를 하는 학생이 아니면 학부생이 밤에 출입할 수 없게 되어있어서 널찍하고 쾌적한 교실들이 텅텅 비어있었다(나와 정훈이는 이 날 그 건물 연구실에서 일하는 토니 덕분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난리통에 공부가 될 리가 있나! 학교 식당이 다 닫아 저녁 내내 잔뜩 굶주린 우리는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생각에 한껏 신이 나 먹고 싶은 메뉴를 큰 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배달하면 EBA지!”
“오 그럼 나는 하우스 스페셜 피자랑 sweet and sassy 치킨 윙!”
“난 Tuscany bread도 먹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메뉴를 정하고서 전화를 건 EBA도 정전 탓인지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음 그러면 타이오키드 어때?”
“타이 음식 좋지! 그럼 난 왕새우 팟타이!”
“난 게살 볶음밥!”
그러나 타이오키드도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당시 새로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다른 타이 음식점에도 전화해봤지만 받지 않았다. 한껏 들떠있던 우리는 점점 시무룩해지고 있었다. 이제 해노버에서 배달 가능한 남은 옵션은 딱 하나, 오리엔트 중국음식점이었다. 여기마저 정전으로 닫았다면 정말로 오늘 밤엔 쫄쫄 굶는 것이다. 우리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오리엔트에 전화를 걸었다.
“오, 오, 오 받았어, 받았어!”
우리는 엄청난 환호성과 함께 감탄사를 연발하고서 마치 속사포 랩을 하듯 메뉴를 주문했다. 오리엔트 아저씨는 우리의 정신없는 주문과 사연을 들으며 전화기 너머로 허허 웃으셨다. 우리의 흥분은 음식이 배달 온 그 순간까지도 가시지 않았는데 이 날 먹은 호화로운(?) 중국음식의 맛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결국 정전 사태가 마무리된 것은 밤 열두시가 다 되어서 이었다. 불이 밝혀진 거리에는 곳곳으로 피난 갔던 아이들이 느릿느릿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불 켜진 방에 녹초가 되어 돌아오니 핸드폰 배터리가 나갔었는데 충전할 수 없어서 연락하지 못했다는 룸메이트 해리가 있었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전을 핑계로 미뤄두었던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우리들의 진짜 밤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던 것이다.
Written by Song Heu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