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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바로 두통이다

by 도서출판 다른


촉각은 어떤 것을 만질 때의 ‘느낌’으로, 관능적인 만족에서 아픔과 고통까지 모든 것을 뜻한다. 이 감각은 매우 범위가 넓어 독자들이 실제로 느낀 건 그중 일부에 그친다. 그러므로 촉각을 묘사할 때는 독자가 자신이 경험한 느낌을 다시 정확히 기억해내게 만들거나, 경험해보지 않은 느낌이라면 어떤 것인지 생생히 짐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신체적인 고통을 잘 그려내는 작가로는 기수였다가 서스펜스 소설 작가로 변신한 딕 프랜시스가 있다. 그는 말에서 여러 번 굴러떨어져 본 경험 덕에 눈을 가늘게 떠야만 보이는 고통에 관해 다양한 세부 사항을 긁어모을 수 있었다. 아래는 그의 소설 『롱샷 Longshot』 중 일부로, 화자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나는 두 손바닥으로 썩어가는 덤불 위를 짚고 무릎을 세우며 일어나려 했다.
나는 거의 정신을 잃었다. 일어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일어나려 할수록 고통은 더 심해졌고, 비명을 지르려 해도 숨조차 들이쉴 수가 없었다. 땅바닥에 다시 몸을 뉘였다. 몸 여기저기를 헤집는 고통밖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고통이 잦아들기까지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에서 몸을 일으킬 수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인지 내 몸이 땅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땀을 흘리며, 찌르는 듯 화끈한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나는 오른손으로 몸과 땅 사이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그 사이에서 막대기 같은 게 만져졌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 인물은 화살에 맞았다. 이제 독자는 화살에 맞아본 적은 없지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할 수 있다. 작가의 묘사 덕분이다. 그의 묘사 실력을 살펴보자. “거의 정신을 잃었다”, “숨조차 들이쉴 수가 없었다”, “몸 여기저기를 헤집는 고통”, “찌르는 듯 화끈한 고통” 이 모든 표현은 고통의 절대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못하게 한다.


소설에서 고통을 묘사할 때는 이 정도의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의 문장으로 이미지를 나타낼 수도 있다. 척 팔라닉이 『인비저블 몬스터 Invisible Monster』에서 쓴 문장을 보자.

두통, 구약성서에서 신이 후려치는 듯한 두통이었어

이런 게 바로 두통이다. “후려치는”, “구약성서”라는 단어를 통해 두통의 강도를 각인시킨다. 이 문장이 ‘두통이 극심하다’보다 말할 수 없이 뛰어나다는 데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소설에서 인물이 느끼는 고통의 단계는 작가가 그 고통의 정도를 묘사하는 단계와 맞물려야 한다. 두통, 심지어 구약성서까지 나온 뒤라면 보통은 고통이 한층 더 심해져야 한다. 또한 두통이 점차 악화되면서 인물의 행동과 이야기가 변화한다면 두통이 어떻게 더 심해지고 있는지 묘사해야 한다. 어쩌면 지끈지끈하던 두통이 더 심해져 머리를 쿵쿵 때리듯이 아플 수도 있다.


인물이 앞으로 겪을 일을 독자에게 정확히 알려주려는 건 좋지만, 묘사를 하면서 독자(또는 인물까지도)를 잃어선 안 된다. 뼈가 부러지고 힘줄이 꼬이는 모습을 그림처럼 묘사하는 건 좋지 않다. 나쁘고 고통스러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주되 너무 지나치면 안 된다.
앞서 프랜시스가 쓴 구절 “몸 여기저기를 헤집는 고통”을 다시 보자. 그는 여기에 훨씬 더 많은 세부사항을 집어넣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적어도 나는 작가가 한 인물이 몸 여기저기를 헤집는 고통 속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다.

소설에 아픔과 고통을 그려 넣어야 할 경우에는 실제 고통을 묘사하기보다는 고통을 겪는 인물의 반응을 강조하자. 프랜시스의 글에서 인물의 행동은 그 자신의 생존은 물론 이야기 자체의 생존에도 중요하다.


촉각을 사용할 때 언제나 인물이 느끼는 바를 묘사해야 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독자가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으면 하는 바를 슬쩍 묘사할 수도 있다. 그러면 독자는 자신이 결코 경험하지 못한 느낌을 연상하게 된다.

여기에 마른 꽃잎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것 같은 단순한 일이 어떻게 정치권력 재편 같은 엄청난 일을 은유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가 있다. 바버라 킹솔버의 『포이즌우드 바이블 Poisonwood Bible』의 한 대목이다.

그들은 천천히 자신들의 지도를 정비했다. 킹, 루크, 비숍 그 누가 멀리서 공격하기 위해 나설 것인가? 누가 장기 말로 희생되어 옆으로 밀려날 것인가? 아프리카 이름들이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속절없이 마른 꽃잎들처럼 부스러져 굴러다녔다—응고마, 무켕가, 물레레, 카사부부, 루뭄바 등등. 그것들은 카펫 위로 먼지가 되어 떨어졌다.

독자들은 정치권력을 재편해본 경험이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른 꽃잎을 부서뜨려봤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그래서 이 작가는 독자가 경험하지 못한 훨씬 커다란 무언가를 묘사하기 위해 독자가 경험한 소소한 행동을 이용했다.


다른 감각들처럼 촉각 역시 단순히 어떤 느낌을 전하는 것 말고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 내가 『외딴 곳 A Place Apart』을 쓸 때였다. 화자와 한 소녀의 관계가 시작된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래서 프랑스 파리를 묘사하는 중간에 소녀의 손가락이 담쟁이덩굴이 자라나는 것처럼 움직이는 장면을 살짝 끼워 넣었다.
소녀의 손가락이 화자의 손등을 어루만지는 행동을 통해 그들 사이에 로맨스가 시작되고 있다는 좀 더 큰 이야기로 독자의 관심을 끌어당긴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파리에 대해 말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한 생미셸 거리와 노천의 카페들에 대해. 그리고 셰익스피어 극단 서점에서 센 강 너머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의 둥그런 부벽이 가파른 벽 위로 얼마나 높이 솟아 있는지에 대해. 그녀는 담쟁이덩굴이 벽을 온통 휘감고 나서 강으로 뻗어간다고 말했다. 순간 그녀의 긴 손가락이 내 손등을 따라 짧은 여정을 시작했다. 마치 담쟁이덩굴이 자라나듯.

이야기를 확장하거나 더 큰 이야기로 주의를 끌기 위해 소소한 것을 활용하는 이러한 장치는 여러 번 사용해도 효과적이다. 작가는 글을 쓰는 동안 배경과 분위기를 확실하게 만들어줄 감각적 세부 사항을 늘 찾아다녀야 한다.
위의 글에 나온 담쟁이덩굴 묘사는 그곳에 담쟁이덩굴이 정말로 있다는 걸 알려준다. 그러나 담쟁이덩굴이 자라나듯 움직이는 소녀의 손가락은 한층 심화된 묘사로, 독자의 주목을 끌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로맨스로 관심을 돌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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