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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서출판 다른 Mar 19. 2019

나도 그림책을 쓸 수 있을까 1

그림책 쓰기의 모든 것

예전에 맹장 수술을 받았다고 해서 직접 맹장 수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어린 시절에 그림책 좀 읽어봤다고 해서 그림책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쉽게 생각하는 걸까?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을 하려면 먼저 컴퓨터 이론을 어느 정도 공부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그림책만큼은 최근에 나온 작품을 읽거나 공부하지 않아도 쓸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문제다. 그림책을 쓸 때는 그림책만의 독특한 글쓰기 형식에 따르고 특정 독자의 특성에 맞춰야 한다. 이 글에서는 그림책이란 무엇인지, 그림책 독자의 어떤 특성을 고려해야 하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그 전에 먼저 내가 겪은 일을 들려주고 싶다.


  몇 년 전 우리 가족이 마당에서 화창한 여름 날씨를 즐기면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교육 현실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만 큰소리가 오가는 격한 토론으로 번졌다. 나도 여섯 명의 열성적인 토론자들 사이에 끼고 싶었지만 단 한마디도 할 틈이 없었다. 철저하게 무시를 당하고 있자니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주먹으로 탁자를 쿵 치고는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내 말 들어봐! 나도 말 좀 하자!”
  그랬더니 그때 열여섯 살이었던 아들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엄마 말을 들으라고요? 왜요? 엄만 아직 글도 못 읽는 애들 보라고 책을 쓰잖아요.”
  그 말에 모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고 나도 마침내 내 의견을 말할 기회를 얻었다. 해피엔딩인 셈이다. 나중에 아들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다가 바로 그게 그림책의 정의를 설명하기에 딱 좋은 첫 구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그림책은 보통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이에게 어른이 읽어주는 책을 말한다. 그래서 그림책에는 대부분 글과 그림이 함께 실려 있다. 그림은 글을 모르는 아이가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만들고, 들리는 말의 뜻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림책의 독자는 전통적으로 어린이다. 요즘에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연령층의 아동을 대상으로 한 그림책이나 그래픽노블(소설과 같은 복잡하고 긴 스토리라인, 문학성을 갖춘 만화)도 나오는데, 이 글에서는 ‘두 살부터 여덟 살까지의 어린이’를 독자로 하는 그림책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두 살부터 여덟 살까지의 어린이가 독자인 그림책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글을 전혀 모르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막 글을 배웠거나 책을 읽는 데 흥미를 붙이기 시작한 어린이를 위한 그림동화책. 그림책은 하드커버(양장)든 소프트커버(반양장)든 대개 32쪽 형식에 맞추어 제작되지만(인쇄 방식에 의한 것으로, 기계에 종이 한 장을 넣어 인쇄했을 때 앞뒤로 총 32쪽이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 글이 들어가는 쪽수는 32쪽보다 몇 쪽 적다. 더구나 원고(레터 용지 기준)는 줄 간격 200퍼센트에 위아래 좌우 여백은 30밀리미터 등으로 글자의 크기나 위치가 설정된다.
  아동도서작가·삽화가협회SCBWI에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그림책 원고 분량은 보통 한 쪽 반에서 최대 열다섯 쪽 정도라고 한다. 열다섯 쪽이나 되는 원고는 분명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쓰였을 것이다.
  대상 독자의 연령층과 집중 시간이 원고의 길이를 결정한다. 하지만 초보 작가들은 너무 길게 쓰는 경향이 있다. 글쓰기 수업을 해보면 두 살짜리 아이를 대상으로 1,000단어나 들어간 원고를 제출하는 학생이 적어도 한 명은 꼭 나온다(영어 단어 기준이다. 영어 200단어는 레터 용지 한 쪽에 들어가는 분량이며, 한글로 옮겼을 때 일반적으로 원고지 3매가량 된다). 내가 아는 두 살배기들은 이야기가 500번째 단어에 이르렀을 즈음에 이미 책을 읽어주는 어른의 무릎 위에서 빠져나와 블록놀이나 부엌놀이를 시작한다.
  그러니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집중하는 시간이 짧은)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위해 이야기를 쓴다면 반쪽에서 한 쪽 정도면 충분하다. 이 정도 분량의 원고는 대부분 보드북(두껍고 단단한 보드지로 만든 책. 튼튼해서 아이들이 물고 뜯어도 쉽게 찢어지지 않는다)으로 출간된다. 보드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글이 아니라 그림이다. 한 쪽에 문장이 하나뿐인 경우가 많고, 때로는 낱말 하나만 달랑 넣은 경우도 있다. 이야기를 듣는 어린이 독자의 흥미를 붙들어 두는 데 그림만 한 게 없기 때문에 아주 어린 아이들이 독자인 보드북은 삽화가(그림 작가)가 작가(글 작가)를 겸한다.


  두 살부터 다섯 살까지의 아이들은 그보다 더 오래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다. 그런 아이들이 독자인 그림책 원고는 두 쪽에서 다섯 쪽 정도로 더 길다. 한 쪽에 약 200단어가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전체 원고는 400단어에서 1,000단어 정도 되는 셈이다. 나는 원고가 여섯 쪽에 이르거나 700단어가 넘어가면 불안해져서 분량을 어떻게 줄일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여섯 쪽에서 열다섯 쪽 정도 되는 원고는 다섯 살 이상인 아이와 성인을 위한 이야기다. 원고의 분량이 많아질수록 책의 쪽수도 늘어난다. 쪽수는 언제나 8배수로 증가하며 최소 32쪽에서 시작해 40쪽, 48쪽, 이런 식으로 늘어난다. 쪽수가 늘어날 때마다 제작비도 늘어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한 번도 책을 출간한 적이 없다면 32쪽 형식에 맞게끔 원고를 손봐야 한다. 아직 이렇다 하게 검증되지 않은 신인 작가의 책에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다면 출판사는 출간을 망설일 수밖에 없다.


  물론 분량에 상관없이, 그림책 작가라면 누구나 독자가 계속 책을 읽고 싶어 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장편소설처럼 긴 이야기를 쓰는 작가는 책을 계속 붙들고 있게 만들려고 독자를 확 끌어당기는 내용으로 각 장chapter의 끝을 장식한다. 그림책에서는 이처럼 독자를 낚는 요소가 ‘모든 쪽’에 들어가야 한다. 질문을 던지고 독자가 답을 찾아 책장을 넘기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니면 주인공을 어려운 상황에 몰아넣고는 그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없게 하거나, 그냥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엄청 궁금하게 만들어서 얼른 뒷장을 펼쳐보게 해야 한다.
  책장을 기어이 넘기게 만드는 기발한 방식의 예로는 마저리 퀼러의 《그건 괜찮아! 그건 안 돼! That’s Good! That’s Bad!》가 있다. 이 그림책은 주인공과 보이지 않는 상대방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인 소년이 정글에서 코를 골며 잠자고 있는 사자를 깨우려 하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상대방은 “어, 그건 안 돼”라고 말하고 소년은 “아니야, 그래도 돼!”라고 대꾸한다. 독자들은 대개 잠자는 사자를 깨우는 일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라고 여긴다. 사자를 깨워도 괜찮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고 사자가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리며 소년의 뺨을 핥는 모습의 그림을 보게 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상대방이 “그건 좋아” 또는 “그건 안 돼”라고 말할 때마다 소년은 반대로 대꾸한다. 이러니 이야기를 읽어주는 어른이나 이야기를 듣는 아이 모두 그 이유가 궁금해 얼른 책장을 넘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림책은 글과 그림 모두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그림책 작가는 정말 필요한 단어만을 골라 써야 한다. 《책 읽기 가장 좋은 곳 The Best Place to Read》을 보자.

  한 소년이 새 책을 소중히 들고선 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곳을 찾아 나선다. 어릴 때 앉아서 책 읽던 의자는 안 된다. 이제는 너무 작다. 할머니의 폭신한 의자도 안 된다. 애완견이 버티고 앉아 꿈쩍도 안 하니까. 야외 테라스에 놓인 의자는 더더욱 안 된다. 잔디에 물을 뿌리는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소년의 옷이나 의자들의 모양, 심지어 소년이 들고 있는 새 책의 제목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 건 책 읽기에 가장 좋은 곳을 찾는 소년에게 모두 중요치 않아서다. 《책 읽기 가장 좋은 곳》의 작가는 삽화가가 창의력을 발휘해 잘 그려주리라 믿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사는 집, 부모, 애완견은 글로 묘사하지 않아도 된다.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묘사는 모조리 빼야 한다. 그래야 작가로서 이야기 속 사건과 대화에 집중할 수 있다.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작가는 삽화가를 겸하지 않더라도 모든 장면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삽화가가 아이의 관심을 끄는 그림을 이리저리 다양하게 그려볼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야 한다.

  다음 네 가지 방법을 써보자.


  1 어떤 일이 벌어지는 장면을 쓴다.

  2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킨다.
  3 등장인물을 다른 장소로 이동시킨다.
  4 장면 속 감정의 깊이에 변화를 준다.


  두 살부터 다섯 살까지의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을 쓸 때는 그림도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게 해야 한다. 즉 작가는 삽화가가 그림으로 자신만의 독립된 이야기를 펼칠 수 있도록 글에 빈 부분을 남겨두어야 한다. 이 원칙을 아주 잘 실천한 로라 누머로프의 《만일 생쥐에게 과자를 준다면 If You Give a Mouse a Cookie》을 한번 살펴보자.

  책의 어느 쪽에서 누머로프는 생쥐가 그림을 다 그렸다고 썼다. 그러면서 생쥐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는 전혀 적지 않았다. 덕분에 삽화가는 생쥐 가족이 나무둥치 집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담은 아주 훌륭한 삽화를 그려 넣었다.
  때로는 세부 사항을 일일이 글로 표현하지 않는 게 삽화가에게 좋다. 내가 쓴 《잘 자요 뽀뽀 If Animals Kissed Good Night》에서 삽화가는 이야기에 손톱만큼도 나오지 않는, 곰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겁에 질린 토끼를 그려 넣었다. 또한 침대에 있는 소녀를 이야기의 시작과 끝 부분에 따뜻한 느낌으로 그려 넣었다. 이 역시 글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실력이 뛰어난 삽화가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집어넣어서 글을 읽지 못하는 어린이 독자가 ‘그림을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실력이 뛰어난 작가는 삽화가가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둔다.


  이 원칙은 원고 분량이 그림책보다 많은 그림동화책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림동화책에서는 글만으로도 이야기를 전하기에 충분하다. 그림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여기서 그림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는 해도 그 자체로 독립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림 중심에서 글 중심으로 균형이 옮겨갔기 때문이다.

  즉 그림동화책 작가는 더 복잡한 이야기를 구성하거나 더 구체적인 묘사를 할 수 있다. 이때 글은 대개 단락별로 끊어지며, 한 쪽 전체를 글이 차지하기도 한다. 데버라 홉킨슨의 《다정한 클라라와 자유의 퀼트 Sweet Clara and the Freedom Quilt》는 노예 소녀가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 몇 년 동안 여러 사건을 겪는 이야기로 분량이 2,000단어가 넘는다. 때로는 그림 없이 여러 쪽에 걸쳐 글만 나오기도 한다. 제임스 랜섬이 그려 넣은 이 책의 삽화는 사건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지만 그림책의 그림처럼 독립된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는다.
  역사를 소재로 한 그림책도 마찬가지다. 《샘과 호랑이들 Sam and the Tigers》처럼 역사를 재구성해서 들려주는 책은 대개 원고 분량이 더 많고, 더 큰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적당한 주제를 담고 있다. 사람과 동물, 심지어 구름과 바람까지도 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거북이 할머니 Old Turtle》가 바로 그러한 예다.




♧ 아이와 어른 모두를 매혹하는 이야기
그림책 쓰기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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