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돈을 유포하는 정권

<인플레이션> 에피소드 02.

by 다산북스

작전명 베른하르트

“영국 경제를 파탄시켜라!”


1939년, 나치의 테러리스트 알프레트 나우요크스(Alfred Naujocks)는 지령을 받았다. 나치친위대원을 동원해 폴란드의 글라이비츠 방송국을 위장 습격하라는 것이었다. 언론에서는 침공 세력이 폴란드 반군이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나치정권이 합법적으로 폴란드를 침입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대서사시가 막을 올렸다.


나우요크스는 1931년 20세의 나이로 나치친위대에 입회하자마자 잔인하고 실력 있는 테러리스트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나치정권의 극비 암살 계획에 투입되어 승승장구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나우요크스가 받은 비밀 지령들은 정말 독특했다. 그중에는 영국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으라는 지령도 있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작전명 베른하르트’다.



나치 독일이 비밀리에 추진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위조지폐 유포 계획, ‘베른하르트 작전’을 다룬 책(1962년)



경제 파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우요크스는 영국에 위조지폐를 대량 유통시켰다.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한 국가에 위조지폐가 범람하면 진폐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대대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국민은 자국 통화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는 것이다. 현대의 선진국들도 통화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정교한 위조지폐가 필요했다. 위조지폐를 제조하기 위해 나치정권은 나치친위대원 장교인 베른하르트 크뤼거(Bernhard Krüger)의 통솔하에 화가, 인쇄업자, 동판조각사, 식자공, 석판인쇄사, 심지어 미용사까지 강제 동원했다.


베른하르트 작전을 바탕으로 한 영화 <카운터페이퍼>의 한 장면



가장 위험한 지폐 900만 장을 찍어내다


대략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베른하르트는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의 비밀 인쇄소에서 위조지폐를 900만 장가량 찍어냈다. 가치로 따지면 1억 3400만 파운드가 넘는 거액이었다. 당시 진폐 유통량의 13퍼센트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1943년 처음 위조지폐를 발견한 영국 중앙은행은, 너무 정교하게 위조되어 이제껏 발견된 위조지폐 중에서 가장 위험한 지폐라고 발표했다.


나치 정권의 당초 계획은 비행기로 영국 전역에 위조지폐를 투하하는 것이었으나 공군의 반대와 비행 연료 부족으로 이 계획은 좌절됐다. 나치정권은 영국에 간첩을 침투시켜 위조지폐 밀거래를 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이번에는 영국 정보국에서 이 작전을 먼저 눈치 채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리하여 나치정권은 위조된 파운드화 지폐로 외환보유고를 메워 적자를 감추고 영국의 의무를 대폭 경감시켜주려는 것처럼 위장했다. 그런데 이 계획마저 실패했다. 대량의 지폐를 투입하지 않아도 영국 경제의 자금은 충분히 순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행은 전후 복구를 위해 발행한 지폐만으로도 충분히 자금 순환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나 결과적으로 보면 히틀러의 위조지폐 제조자 베른하르트의 작전은 성공한 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영제국이 멸망한 후 세월이 흘렀고 많은 양은 아니지만 파운드화 위폐가 경매에서 수천만 파운드에 거래되고 있으니 말이다.



베른하르트강제수용소.jpg 베른하르트의 통솔하에 위조지폐 900만 장가량을 찍어 유통시켰던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화폐체계를 교란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이용한다?


화폐시스템을 교란시켜 한 나라를 망치겠다는 아이디어는 나치정권 당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18세기에 영국은 프랑스혁명을 진정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대량의 위조지폐를 프랑스로 밀반입했다. 몇 년 후 나폴레옹 내각의 경찰장관 조제프 포체(Joseph Fouché)는 위조지폐를 모스크바, 런던, 비엔나로 이송시켰다.


오스트리아는 전쟁통에 지폐 조판을 도난당한 상태였지만 다행히 2억 장에 달하는 위조지폐 중 소량만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반입되었다.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는 바람에 ‘오스트리아 화폐 교란’ 계획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독일에 위조지폐를 유통시켜 독일 경제를 붕괴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결국 포기한 바 있다. 한편 미국 정부는 북한이 달러화 위조지폐를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북한이 미국 경제를 동요시키려는 목적보다는 외환보유고 확보를 위해 위조지폐를 제작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통치자에 의한 인플레이션 이용과 관련해 구소련의 독재자 레닌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레닌은 자본주의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통화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플레이션을 이용하면 조용하고 은밀하게 국민이 누려야 할 복지의 일부를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레닌의 주장이 옳다. 사회를 전복시키는 데 화폐 체계를 교란시키는 것만큼 주도면밀한 방법은 없다.”




글 및 사진 출처 : <인플레이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콜라가 사라진다면 어떤 음료로 대신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