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라는 이름의 알사탕 한 알

업히기만 하는 존재는 없다

by 다시 나



"봄"


봄— 하고 입술을 오므려 불러봅니다.

영하 15도가 넘는 혹한이 계속되더니, 입춘이 지나자 약속이라도 한 듯 봄 햇살이 공기 속으로 스며듭니다. 햇살은 눈부시게 부서져 아지랑이로 피어오릅니다. 나도 모르게 한껏 웅크리고 있던 등과 어깨가 펴지며 입안으로 다시 "봄" 하고 소리 내 봅니다. 하루 종일 입속에서 알사탕을 굴려 가며 천천히 녹여 먹듯, 그렇게 "봄"을 물고 다녔습니다.


봄은 바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온 봄바람은 여전히 차갑지만, 그 끝이 무뎌져 뺨에 닿는 감촉이 싫지 않습니다. 어느새 봄 내음을 머금은 바람은 꽁꽁 얼어붙은 강물을 유혹합니다. 겨우내 봉인된 슬픔 위로 미소가 번지도록 마음을 흔듭니다.


봄은 빛과 온기로 옵니다. 언 땅이 몸을 풀어 새싹이 돋아날 수 있도록 부드러운 빈틈을 만듭니다. 지난 봄날의 그리움을 안은 새싹이 그 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햇살과 눈을 맞추면, 그 사이로 다시 온기가 스며듭니다.


남도에서는 벌써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겨울 동안 묵묵히 꽃망울을 머금었다가 터뜨린 꽃들입니다. 나는 이렇게 피어난 꽃을 보면 "애썼다, 고생 많았다"라는 격려부터 앞섭니다. 무던히도 겨울의 강을 건너왔을 그 고됨에, 매서운 바람과 시린 하늘을 견디며 결핍된 햇살을 그러모았을 그 시간에 경의를 표합니다. 깊은 어둠 속의 차가운 달빛과 별빛까지 응집시켜 이토록 작고 연약하며, 보드랍고 눈물겨운 존재로 피어난 꽃을 향해 탄성을 쏟아냅니다.





세상에 업혀가기만 하는 존재는 없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를 업고 가는 엄마도 아이를 업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아이에게 업히는 존재라는 말에 깊이 동의합니다. 아이가 내 등에 기대어 쌔근거리며 숨을 쉬고, 뒤척이다 잠들었던 30년 전의 그 감격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세월이 흘러도 등의 감촉과 아이의 숨소리, 그 온기는 여전히 생생합니다. 그때의 황홀감은 내 생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무늬가 되었습니다.


아이를 업어 키웠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아이의 온기에 업혀 위로받았던 것처럼 지금 내게 오는 봄도 그렇습니다. 매서운 겨울을 견뎌낸 매화가 대견해 박수를 보내며 그 꽃잎의 생명력에 내 지친 마음이 가만히 기대어 그 화사함이 내게도 스며들기를 기대합니다.


세상에 홀로 걷는 길은 없습니다. 이번 계절산책길에서도 저는 여전히 무언가를 품고, 또 동시에 무언가에 기대어 걷습니다. 입속에 머물던 알사탕 같은 '봄' 한 알이 완전히 녹아 온몸으로 퍼질 때쯤, 저의 산책로에도 이름 모를 꽃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 것입니다.



이번 '계절산책'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봄바람의 무뎌진 끝자락이 닿기를 바랍니다. 꽁꽁 얼어붙은 슬픔 위로 미소가 번지고, 그간의 고생이 예쁜 꽃망울로 터지기를. 입술을 오므려 다시 한번 작게 불러봅니다.


'봄'


오늘 나의 산책 길은 봄 마중이었습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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