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걸었고, 이제는 그냥 걷습니다
어느 날 새벽, 고열과 오한으로 온몸을 떨며 잠에서 깼습니다. 고단한 일상이 불러온 단순한 몸살이려니 했습니다. 그때의 나는 세상의 속도에 맞춰 전력 질주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약 기운으로 버텨낸 하루 뒤엔 어김없이 원인 모를 고열이 2주 넘게 이어졌습니다.
수없이 반복된 채혈과 온갖 검사와 골수 검사까지 하고 나서 마주한 이름은 '성인형 스틸병(AOSD)'. 나의 면역 체계가 나의 몸을 막아내여하는 적으로 인식해 공격하는, 희귀하고도 고약한 '배반의 병'이었습니다. 고용량 스테로이드와 면역억제제에 몸을 맡긴 채, 중환자실과 일반 병동을 제집처럼 오가는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차가운 중환자실에 누워 '삶이 여기서 멈춘다면'을 생각했습니다. 이상하게 미련이 크지 않았습니다.
"참 애썼다, 사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그동안 한 번도 치열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요.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아이의 빈자리가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적어도 아이를 빈 들판에 혼자 두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다행이다 안도했습니다. 삶을 채 알기도 전에 애만 쓰다 먼지처럼 사라지는구나 싶은 씁쓸함마저, 그 안도감 속에 녹아들었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나는 ' 나를 스스로 책임지고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공부도, 관계도, 사회생활도, 모든것에 최선이어야 겨우 버틸 수 있었던 삶, 내 안의 책임감은 이를 악물게 했고, 그것은 어느새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그만 멈추기로 했습니다. 결국 그해 겨울, 회사를 떠났습니다.
병원에서의 밤은 차갑고 날카로웠습니다. 새벽마다 잠결을 파고드는 바늘과 소독약 냄새, 커튼 너머 들려오는 타인의 신음 소리... 그 불면의 시간을 지나 돌아온 집은 비현실적으로 아늑했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들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나를 부서질 듯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 큰 어깨를 타고 전해지는 가느다란 떨림. 중환자실 유리창 너머로 엄마를 바라보며 홀로 삼켰을 아들의 공포와 안도가 그 짧고 묵직한 포옹에 담겨 있었습니다.
퇴사 후 맞이한 첫 겨울, 나의 일과는 아들에게 '엄마 밥'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완벽했습니다. 덤으로 얻은 것 같은 이 시간 동안 나는 매일 아이를 안아주고 등을 쓰다듬었습니다. 혹여나 생길지 모를 나의 빈자리를, 이 따스한 기억의 겹들의 시간이 대신 채워줄 수 있길 바랐습니다.
오전 열 시쯤, 예전 같으면 쏟아지는 메일함과 치열하게 씨름했을 그 시간에 나는 물병 하나를 챙겨 숲으로 향합니다. 빽빽한 서류 더미 대신 나무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은 바람처럼 자유롭고 가벼웠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나를 반겼고, 바람에 부딪히는 잎사귀 소리는 마치 "고생했어, 잘하고 있어"라는 응원처럼 들렸습니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눈을 감은 채 햇살에 얼굴을 맡깁니다. 멈춰버린 줄 알았던 나의 시간도 숲의 리듬에 맞춰 아주 천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풍경은 늘 새롭습니다. 어제 보지 못한 들꽃이 인사를 건네고, 햇살이 머무는 자리마다 생명이 돋아나는 떨림이 느껴집니다. 지는 목련과 피어나는 벚꽃 사이를 거닐며, 나는 벅찬 삶의 한때를 통과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마음이란 참 꽃 같아서, 피어있는 시간보다 무시로 저버릴 때가 더 많습니다. 몸이 좀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복병처럼 찾아오는 통증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앞만 보고 달리던 발걸음을 멈추고, 숲의 향기를 음미하며 꽃이 전하는 말을 배우는 중입니다. 강제로 멈춰 서야 했던 그 질병 덕분에, 나는 이제야 나만의 속도로 걷는 법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통증은 여전합니다. 숲이 나를 단번에 고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엔 살기 위해 걸었고, 지금은 그저 걷습니다.
지난주 수요일 (3월 3일) 연재 글 "쯧쯧쯧이 없는 밥 먹었니? " 글이
실수로 연재 형식이 아닌 일반글의 형식으로 발행되었습니다.
지난 글 관련해 링크를 남깁니다.